※ 본 글은 지난 24년 7월 3,4,5,6일에 있었던 사랑의교회 대학부 연합수양회 설교말씀을 다시 묵상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삶 자체가 예배라면 굳이 예배는 왜 드리는가? : 예배의 은혜”
김지찬 목사님 (전 총신대학교 교수님)
레위기 23장 9~14절, 22절
지난 2천년 동안 교회는 주일날 모여서 예배 드리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숨겨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각자의 장소에서 일하다가 한 장소에 모여 예배할 때 비로소 교회의 가시적인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한, 주일 예배야말로 주님 안에서 영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이기에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런데 최근 들어와서 예배를 등한시 여기는 현상이 생겼다. 평균 교회 출석율이 70%라고 한다.
성가대 찬양을 드릴 때, 그러니까 예배 중간에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비중도 20~30%되는 것 같다.
그리고 코로나 이후 비대면 예배가 확산되면서 아직도 30% 정도는 비대면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통계도 있다.
"삶 자체가 예배"라는 고상한 이론이 한국 교회에 들어오면서 예배가 등한시 되는 문화가 생겼다.
지난 40년 동안 예배보다는 삶 자체가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조된 결과, 오히려 삶이 예배로 바뀌지 않고 예배를 아예 참석하지 않는 비중이 늘고 있다.
애초에 삶 자체가 예배라고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삶 자체가 예배라는 명제적 이야기만 할 뿐, 실제 삶의 방법적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교회를 제대로 가지도 않으면서, 삶 자체가 예배라는 말을 이렇게도 뻔뻔하게 할 수 있는가!
그건 바리새주의로 인한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경쟁하는 사회 속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대학생, 직장인들은 수많은 죄를 짓는다. 이에 반해, 평범한 사람들보다 꽤나 지적인 자리에 있고(지식인), 아는 것들이 많은 윤리인(?)들, 죄를 덜 짓는 사람들 중에 교회는 나오지 않으면서 번지르르하게 “삶 자체가 예배”라는 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배가 중요하다"고 말하면 느낌상 구약에 기대면서, 남들보다 도태된 것 같아 보이기 쉽다. (필자의 말: 소위 꼰대(?)들이나 하는 말 같다.) 반면에, “삶 자체가 예배다”라는 말은 겉보기에 멋있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삶 자체가 예배"라면, 굳이 우리가 주일마다 왜 번거롭게 예배를 드리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오늘 본문에 보면 레위기 23장 전체가 7가지 절기를 다룬다. 특히 오늘 본문은 칠칠절에 대해 다루고 있다.
레위기 본문 전체에서 제사와 예배를 다루고 있는데, 갑자기 뜬금없이 정 가운데에 삶에 대한 규례가 등장한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처럼 삶에 대한 규례가 나온다.
레위기는 아직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이다 보니,
이후 하나님이 주신 땅에 들어가 살게 되었을 때 보리 추수 한 단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기 전에는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라고 경고하신 말씀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왜 제사를 드리고 난 후에야 추수한 것을 먹을 수 있었을까?
"제사를 드리고 나서 먹는다" 것을 오늘 내용에 적용해보면, 삶 자체가 예배라는 말은 말이 안된다.
이 말은 예배가 먼저 선행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이삭 한 단을 '누구에게 가져오는가'는 그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나타낸다.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여기서 ‘흔든다’는 것은 ‘들어올리다’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상하로)
(cf. wave offering과 elevating offering 의 차이는 좌우와 상하로 흔드는 것의 차이다.)
모든 제물은 태워서 하나님께 드린다. 그러나 화목제물은 제사를 드린 후 제사장이 먹는데,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하고 강조하기 위해 흔드는 방식으로 요제를 드리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께 보리 첫 한 단을 드리는 것은, 우리의 소유를 우리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받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의 제사를 드리는 것, 그게 바로 예배다. 주님께 스스로를 드린 자답게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 그게 바로 예배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으로 거둔 한 단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기억하고 요제로 하나님께 받쳤다. 즉, 이삭은 인간적인 노력으로 거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고 고백하게 된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오는 그 날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지니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규례니라”
이로써 영원히 지켜야 할 규례가 된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예배가 삶보다 중요한 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삶 자체가 예배라고 한다. 예배를 잘 한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게 아니라고 유튜브에서 말하지만, 그게 정말 중요한 포인트인가?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게 아닌 것은 맞지만, 신앙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는 예배를 반드시 드려야 한다. (필자의 말: 즉, 예배는 좋은 신앙생활의 절대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인간은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우리가 가진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땀을 흘려 얻은 소출이니, 그 소출은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땅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그 곳이 가나안 민족의 땅이었고, 그들의 땅이 아니었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교회를 나옴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임을 느낄 수 있고,
그 시간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그 시간이 하나님의 것임을 안다.
또한, 헌금을 드림으로써 그 모든 소유와 재물이 우리의 노력이 아님을 깨닫고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심을 기억하고 고백하게 된다.
우리가 가진 것이 선물이라는 사실을 잊고 사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삶을 예배로 올려드릴 수 있겠는가?
힘들고 어려울 때, 예배 자리에 들어오면 눈물이 핑 돌기도 한다.
이는 말씀이 축적된 힘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다.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주인되신다는 것을 깨닫는 인식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님께 곡식을 드리면 끝인가?
=> 아니다. 곡식을 드린 그대로 살아내야 한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의도적으로 이렇게 곡물을 남겨두는 풍습은 이스라엘만의 놀라운 풍습이다. 밭의 모퉁이를 아예 베지 않는 규정은 고대 근동 어디에도 없는 규정이다.
경제적으로는 손해일텐데, 왜 모퉁이의 일부는 베지 말고 남겨두라고 하는 것일까?
이는 땅을 거져 선물로 받았으니까, 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소출의 일부를 거져 주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게 해석이 될까.
이러한 말씀은 세상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신비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았으니 자신의 모든 것을 선물로 거져 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예배를 대강 드리거나 제대로 드리지 않으면, 모든 것에 인색하며, 아끼게 되고 너그럽지 않게 된다.
이러한 사람은 대게 거져 준다는 개념 자체에 대해 인식하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거져 받았으니 거져 준다는 개념은 쉽지 않은 것이다.
추가로 목회자의 삶은 끊임없이 주는 삶이 되어야지, 받는 삶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으로부터 성령과 은사를 선물로 받아 모든 것을 거져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령과 은사를 축복으로 받은 후에 모든 것을 거져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는 특히 교회의 리더들, 대학부 리더들, 사역자들, 목회자들에게 적용되는 부분이다.
성도들도 마찬가지로 세상에 나아가 살 때, 거져 받았으니까 거져 준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시며…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라”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들에게 가서 천국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보내신 것이다. 죽어가는 자들을 살리라고 우리를 보내셨다.
교회는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실천을 위해, 정기적으로 예배가 필요한 것이다.
교회가 아니면 이러한 말씀을 어디에서 듣겠는가?
목사님의 설교, 찬양 가사, 성가대 찬송도 모두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자”는 정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우리는 이러한 정신으로 세상에 나아간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과거에 우리를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끌어당겨 지금 여기, 예배의 자리에서 맛볼 수 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베푸실 은혜를 기대하게 되고, 전율을 느낄 수 있다.
삶은 예배의 대체가 아니고, 예배의 연장이다.
삶 자체가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예배를 먼저 드려야 한다. 그래서 예배와 삶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예배를 드리는 자들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살게 된다.
EX) 예배 가운데 대표기도를 맡은 장로님은 5분 기도를 맡은 것 때문에, 토요일에도 놀러 가지 않았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자들은 예배를 소중히 여기기에, 조심스럽게 살게 된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산제물을 제사로 드려야 하는데, 어떻게 제물이 산 것이 되는가?
여기서 제사라는 것을 두고 누군가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삶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어서 산 것이라고 잘못 해석한다. 이런 사람들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잘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산 제사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몸인 옛사람을 죽여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삶이 진정으로 산 것이 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죽음’이 있어야 한다. 죽음의 경험 없이는 진정한 생명을 경험할 수 없다.
이렇게 살았던 실제적인 역사적 인물이 있다. 바로, '짐 엘리엇'.
그는 설교를 워낙 잘했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설교가로 남지 않고 선교를 가는 것에 대해 낭비라고 말했다.
짐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짐 엘리엇의 일기를 모아 “전능자의 그늘”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다음은 그의 일부이다.
“조금도 당황하거나 놀라지 마십시오… 양이 초장에서 배불리 먹는 것도 한가지 목적입니다. … 그러나 그 분의 제단에 불림 받은 것도 합당하게 여기십시오.”
20대에 양의 우리 안에 들어가서 안식을 누리는 것이 우리의 꿈이지는 않던가?
그런데 짐 엘리엇은 어린 나이에 제단에 받쳐지는 양으로서의 비전과 소명을 발견했다.
짐 엘리엇은 "삶으로 예배를 드린다", "삶 자체가 예배다"라는 말로 고상한 척하지 않았다.
그는 양 떼의 운명은 결국 제단으로 가는 것이라며, 피의 제물로 사는 것이 그 양의 운명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짐 엘리엇과 같은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다. 그처럼 죽음을 맞이하는 삶을 살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여기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은, 죽음 앞으로 나아가 십자가의 죽음을 경험하고 다시 사는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곡식을 거둘 때 곡식 밭의 모퉁이에 곡식을 남겨두는 것이다. 경제적 손실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는 것이다.
예배는 1차적인 윤리이고,(primary ethics) 삶은 2차적인 윤리적 행위(secondary ethics)다. 삶 자체가 예배가 되려면 1차적인 예배가 전제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초월적 은혜를 경험하지 않으면 결국 자신이 하는 윤리적인 행위는 자기 자랑, self love, self preservation, self promotion, self win이 되는 것 뿐이다.
로마서 12장 말씀을 참고하라.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여기까지는 예배를 드리라는 것.)…
- [형제를 사랑하며… 부지런하며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높은 데에 마음을 두지 말며… 악에게 지지 말고… (위에서 예배를 통해 거룩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러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어떤 곳에서든 예배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배자가 되려면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예배를 할 때에만 가능하다. -(루즈벨트)-
루터가 흑사병이 유행할 때 보인 행동은, 우리가 어떻게 예배를 대해야 하는지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흑사병은 치사율 75%로, 죽음과 매우 가까이 있었다. 흑사병에 대한 올바른 대처는, 그 환자와 함께 있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가장 좋은 게 격리여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자를 내팽게 치고 도망갔다. 우리 역시 환자의 옆에서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는 사실에 공감할 것이다.
루터도 피신해야 한다는 조언을 들었는데, 루터는 명령을 거부하고 도시에 남았다.
그가 남은 이유는 뭔가? 그는 죽어가는 자들의 영혼을 돌보고, 환자와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남았다.
물론 루터의 주변인들도 흑사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다시, 질문한다. 그는 왜 남았는가?
- 그는 죽어가는 자들을 심방하면서 임종 예배를 드림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해야할 의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Living onto God보다 Living onto man 으로 살아간다. 즉,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자기 자신을 섬기는 것 중에 후자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Living onto God, 즉 예배를 통해 어떻게 죽을지를 알아야 어떻게 살 수 있는지(Living onto man)를 알 수 있다.
이 사회가 죽음을 무릅쓰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회임을 고려할 때,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는 죽음을 무릅쓰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즉, Living onto God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죽음을 무릅쓸 때, 비로소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분명 앞길이 막막하고 두려운 순간이 많을텐데, 그 순간에도 마귀를 이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즉, 강력한 약속이다.
하나님은 이 말씀으로 약한 자들을 도우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직접 돌보아주시는 의사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멋진 의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루터의 모습을 보면,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젊어서부터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예배에 목숨을 걸지 않으면 단 한순간도 살 수 없고, 성령을 받을 수 없고, 은사를 받을 수 없다.
예배에 목숨을 걸지 않고는 유혹을 이길 수 없으며 세상을 이길 수 없고 마귀를 이길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 세상에 보일 수 없다. 예배에 목숨을 걸지 않으면 우리가 세상을 이길 능력이 있음을 보일 수 없다.
그러니, 하나님으로부터 예배의 능력을 공급받아 삶 자체가 예배가 되길 축복한다.
'Note > Sermon Note' 카테고리의 다른 글
25.4.27 사랑의교회 대예배 (0) | 2025.05.04 |
---|---|
25.4.20 사랑의교회 대학1부 집회 (0) | 2025.04.20 |
10.01 추석 대학부 연합예배 (0) | 2023.10.01 |
9.17 대학부 연합예배 설교 (1) | 2023.09.29 |
9.24 대학1부 설교 (0) | 2023.09.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