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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ermon Note

10.01 추석 대학부 연합예배

by SeolLab. 2023.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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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연애란? 

(마태복음 1장 24~25절)

책읽는 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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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국민 주권 시대, 나에게 주권이 있다고 배우는 시대에

내 주권은 당연히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먼저 고백할 수 있는가? 

 

첫째 핵심 코드는 나에게 주인이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기독교 세계관이든(연애든, 물질이든), 내 주인이 누구인지를 아는 게 가장 중요한 첫 출발점이다. 

 

둘째, 절대 기준은 오직 '예수'라는 것을 기억하라. 포스트모던 시대에 절대 기준이 있다는 말은 상당한 반발이 있을 법한 주장이나, 예수 그리스도라는 절대 기준이 존재한다. 

 

셋째, 주를 위한 절제적 연애를 해야 한다. 

 

오늘은 위의 세가지 핵심 주제를 중점적을 다루고, 연애에 관한 몇몇 질문에 질의응답을 받는 식으로 강의를 진행하려 한다. 

배우자 기도 어떻게 해야 하냐, 배우자인지 어떻게 확신하냐 등등 주요 질의에 문답할 것. 

 


책 읽는 사자

 

당신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는가? 

아끼는 핸드폰마저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데, 당신의 신체를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물질계인 우주와 물질계 안의 인간은 하나님께 주권이 있다. 그렇기에 지적 존재이신 하나님의 존재가 물질계에서 너무나 중요하다.  우리에게는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님을 인정하고, 가치판단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렇게 살 책임이 있다. 

 

하나님께는 두 가지 속성을 가지신 분이다. 바로 '인격신'과 '사랑신'.

전자는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데에서 알 수 있으며, 후자는 하나님 그 분 자체가 사랑이라는 사실을 토대로 알 수 있다. 

 


 

교회 생활에 익숙해져있고, 교회 생활에 젖어 있는 사람은 메타인지적 관점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스스로 교회문화에 너무 익숙해서 신앙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정말 예수를 믿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교회 문화에 익숙해지는 것과 정말 예수를 믿는 건 별개니까. 특히나 못해신앙들

 

 

우리의 연애와 결혼 가치관은 '성경적 가치관'이라는 안경을 통해 파생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 울타리 안에서 사랑을 나눠야 하는 것이 우리가 맡은 책무니까. 이건 선택이 아니라 우리의 의무다. 

여기까지 따라왔는가? 여기까지 지성의 깨달음이 있었길 바란다. 

 

 

<성경적 종말론자>

기독교의 시공간의 역사체계는 분명한 시작과 끝이 있는 목적론적 세계관이다. 세상에는 분명한 끝이 있는데, 심판이 있는 끝이다. 성경 믿는다는 사람이 무서운 이유는, 모든 시간의 흐름,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허황된 소설이거나, 완전한 진리이거나...  둘 중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당신은 어떻게 믿는가?

만약 완전한 진리로 믿기로 했다면 당신은 성경적 종말론자

 

 

 

 

<절제주의자>

성경은 일상 생활 속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일이 예수님께 한 것이라고 말한다.

가치 판단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오직  예수님께서 절대 기준이 된다는 것.  

우리들이 사는 세계관은 전지전능한 성삼위 하나님이 계신 세계관이다.

유일신인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는 게 옳은 것이며 그르다고 하는게 그른 세계관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세상 문화에 핍박을 받기가 너무 쉽다. 예수님께서 사랑이라고 하는 것만 사랑인데, 세상은 프리섹스에 대해 괜찮다고 말하며 사랑에 대해 성경과 반대로 말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문화가 우리의 세계관과 계속해서 충돌한다.  

모순적인 건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충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 무신론자/ 유물론자  (둘을 합쳐 '자연주의자'라고도 함.) >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같이 만들었다고 하신 하나님. 눈이 보이는 세계는 자연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는 초자연계(영적 세계). - 자연법칙, 도덕법칙, 영적 법칙이 '초자연계'에 해당한다.  -> 하나님의 법이 여기에 새겨진 것. 

 

세상은 자연계와 물질계는 물질밖에 없다고 보나, 우리는 초자연계의 존재에 대해 일말의 부정도 없다. 

하나님을 뺀 자연의 설명으로 대표되 것이 진화론... 하지만 우리는 안다. 초자연계의 역사를. 

 

 

세상은 성경을 왜 자신에게 강요하나고 따진다. 그것이 진리인 줄도 모르고. 

또한 무신론자는 십일조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판단을 '자신을' 기준으로 사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성경적 세계관과 세상의 세계관은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성경적 세계관과 세상의 세계관의 충돌은 성격의 충돌이 아니라 영적 충돌이기 때문이다.

성경적 세계관에서 황금으로 보는 것을 세계는 똥으로 본다. 우리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세계가 황금으로 보는 걸 크리스천은 똥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 그래서 크리스천들끼리 결혼하라고 하는 것이다. 

세계관이 다르면 과정도 다르고 결론도 다르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다르기에 서로 섞일 수가 없다. 

성경적 세계관 안경을 쓴 사람들은 거룩과 음란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크리스천들은 '절제주의자'가 된다. 고린도후서를 보라. 사랑은 오래참는 것이라고 한다. 세상은 짜릿한 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심장이 뛰는 대로 따라가라고 하는 게 세상이 말하는 사랑이다. 

세상이 말하는 사랑은 쾌락주의다. 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연애는 output이 다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연애는 성령충만으로 가득해지는 반면 기뻐하시지 않는 연애는 음란으로 가득해진다. 

'내 혀가 피자를 맛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내 몸에 건강한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서로 다른 것이듯, 나한테 좋은 연애와 쾌락적 연애는 완전히 다른 것임을 기억하라.  

 


 

질의응답: 

 

Q: 배우자 기도를 해야 하나요? 

A: 무조건 결혼하기 위해 힘쓰라.

사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여러분도 알지 않는가? 사단은 영적인 진리를 정확히 알고 있다. 사단은 하나님이 복이라고 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어서 하나님이 복을 저주라고 속인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말하는 복인데, 사단은 결혼을 저주라고 말한다. 요즘 세상을 보면 비혼주의가 주류가 되지 않던가? 
물질의 관점으로 보면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로 보는 것이므로, 여기서 해방해야 한다고 하는게 여성해방...

 

강사님은 본인이 직접 배우자 기도를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주님 저는 ~~ 이런 배우자를 주십시오")

배우자를 놓고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워보이지 않는가? 이건 기도가 아니라 주문에 가깝다. 

이런 기도를 해야하나, 하지 말아야 하는지 묻는다면 먼저

기도제목을 살펴보면서 이 기도제목이 나를 향해있는지, 하나님을 향해 있는지를 생각해보라. 

오히려 강사님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짝이 있다면, 내 물리적 반경 안에 지나갈 때, 내 영적 안테나를 갈고 닦아서 그 여자를 알아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건, 자신만을 위해 문을 두드리던 사람에서 하나님을 위해 문을 두드리는 '내'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건,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하고 판단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함께 가정 예배를 드리는 가정이 되도록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볼 수는 있겠지. 
양가가 예수님을 믿고 귀하게 쓰임받는 가정이 되게 해달라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을 찬야앟는 가정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겠지. 

 

배우자의 기도가 쌓이지 않아서 이러한 배우자를 만났나? 는 틀린 것 같다. 그럴 시간에 하나님을 함께 찬양할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할 것. 

나와 엇비슷한 신앙관의 사람을 만나야 할 것. 사랑의교회와 같은 건강한 교회에서 outreach 같이 가고 말이 어느정도 통하는, 신앙관이 엇비슷한 사람을 배우자의 목록에서 빼지 말라는 것. 

배우자 기도에 메이지 말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연습을 하면 자연스럽게 풀리게 될 것. 

 


 

Q: 크리스천과 연애 * 결혼을 해야 하나요? 

A: A라는 남자는 교회는 다니는데 쓰레기고, B라는 남자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데 젠틀한 상황이라면 참 막막할 것... 
결혼이라는 제도, 성관계에는 영적 의미가 있기에 사도바울은 크리스천과 결혼하라고 한다.
피임과 성관계는 쾌락으로 전락해서 축복이 아닌 물질주의적 관점이 될 수 있으므로, 결혼과 성적 문제는 환타지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임을 기억하라.(글쓴이 덧붙임.)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도 버러지가 많다. 교회 다닌다고 하면서도 상처를 너무 많이 주는 사람이 많은데, 그럼에도 결혼 문제는 현실문제임을 기억하고,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은 또, 또, 또 다시 생각해보길 바란다. 

 

이런 시나리오가 있을 수 있다. 
불신자 배우자가  "토요일 새벽에도 교회가?" 라고 한다면.

"이걸 왜 교회에 갖다 바쳐? "라고 한다면. 

"내가 이거 너 양보했는데 너도 예배 나한테 양보하면 안돼? 꼭 교회 가야돼?" 라고 한다면

 

교회를 다니지 않지만 젠틀한 사람은...

완전히 다 뜯어 고쳐야 한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보다 못하다! (이건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에, 우리의 손 밖에 있다.)

혹자는 이런 사람을 두고 이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완벽해질 것이라고 한다.

이들이 교회를 간다고 해서 성령충만해질 가능성은, 크리스천인 내가 세상적으로 될 가능성보다 희박하다. 

non크리스천과 연애를 하면 하나님과 멀어질 가능성이 높다. 

결혼이 가진 신학적 영적 의미, 신비가 있기에 우리는 기독교인과 결혼하는 것이 좋다. 

 

 

사도바울은 이미 non 크리스천과 결혼했다면 이혼하지 말고, 그를 전도할 것을 권유한다. 그 사람이 후에 간증할 지 어떻게 아냐? 이것도 사명이니까 이혼하지 말고 전도하라는 것. 하지만 아직 결혼 전이니까 영적으로 너무 큰 소모가 발생하는 non 크리스천과의 연애를 말리는 것. 

 

 

내가 non 크리스천과 연애를 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거짓말 하는 횟수가 늘어나지는 않는지, 음란의 열매가 열리진 않는지 살펴보라. 

 

 

 


 

 

Q: 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내 사람'인지 어떻게 확신하나요? 

A: 반전적 인사이트를 하나 이야기하자면, 내 확신이 확실해서 이혼을 안하는 게 아니다. 

결혼식 날 메이크업을 할 때까지 상대가 내 배우자라는 걸 확신하기 어려울 수도. 

그걸 확신한다고 해서 행복의 깊이가 달라지는 게 아니다. 확신이 그렇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것. 

 

자기 확신이 있어서 오히려 더 불행한 결혼생활이 될 수 있다. 나의 확신으로 결혼했거나 결혼하지 않는 건 위험할 수 있다. 사람은 변할 수 있기에. 내 생각과 경험을 토대로 판단을 하면 후회할 수도 있다. 내 생각은 바뀔 수 있기 때문. 그렇기에 가치판단을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하라는 것. 지금은 A라고 생각할 지 모르나(결혼 안할거라고 했으나) B라고 30대 되서 바뀐다면? 
확신보다 중요한 건 확률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기에,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건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더 닮아가고,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는지 고민하다보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신앙생활을 할 확률이 올라간다는 것. 그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길이다. 

 


 

 

Q: (못 들었다)

A: 미디어 컨텐츠를 보면 포스터만 보아도 성적인 것들이 난무하는 시대다. 

자유의지가 도파민에 절어있는 경우가 많다. 세상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성적인 컨텐츠를 주입하고 있다. 

 

거룩의 영역에서 성경적 가치관에 입각한 연애를 하더라도 한번도 안넘어지지 않는다. 수없이 넘어질 수 있다. 넘어지지 않는 게 핵심이 아니다. 

100번을 넘어지더라도 예수님을 위해 101번 일어나는 게 믿음이다.

싸우더라도, 연애를 하다가 넘어지더라도 일어나면 된다. 패배의식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100번 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역사적 사건이라면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죄를 안짓는 유토피아 사람인 게 아니라, 죄에서 멀어지기 위해 부단히 싸우는 사람이어야 한다. 
연애를 하면 할수록, 깊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연애는 그 일상성이 중요하다. 


지금은 하나님이 말하는 사랑을 차별이라고, 꼴통이라고 하는 세상이다. 또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하지 안흔 것을 예쁘게 포장하는 시대다. 성은 하나님의 나라를 공격하는 사단의 무기 중 하나다. 그렇기에 크리스천들은 이에 대응해 소금과 빛으로써 세상을 치열하게  살아가야 한다. 

 

배우자를 가장 사랑할 수 있는 성경적 진리가 뭔지 아는가? 

예수님을 아내보다 더 사랑하는 행동이다. 그게 바로 아내를 가장 사랑할 수 있는 성경적 진리다. 

천국은 '우리'의 단위가 아니라 개개인의 신분으로 들어가는 곳이다. 

연애 때 '우리'에 의미부여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기에, 나와 예수님 사이의 관계를 0순위로 생각하고 신앙생활하기 바란다. 

 


 

Q: 결혼 전 스킨십은 어디까지 허용되나요?  

A: 맥주 한캔의 논리를 들고 싶다. <이성에서의 도피> - 프란시스 쉐퍼 의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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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이성에서의 도피 - 예스24 www.yes24.com 저작권 보호를 받는 이미지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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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에 '맥주 한캔'이 들어온다면 어떻게 될까?
-"사도 바울도 누군가가 내가 술마시는 모습을 보면서 시험드는 걸 조심하라고 했으니까 나 혼자 집에 방 한구석에서 맥주 한캔을 먹는 건 괜찮지 않을까?"

 

그런데 이런 생각이 죄의 확장성, 점진성으로 이어진다. 

사단은 광명의 천사로 온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이 있듯이, 죄는 은밀하게 다가온다.

 

- "맥주 한캔이 괜찮다면, 두 캔도 괜찮지 않을까?" 


처음에는 맥주 한캔으로 들어왔는데, 계속 타협하게 된다. 거룩과 구별된 삶이 아니라, non 크리스천과 구분할 수 없는 삶으로 발전하게 된다. 

스킨십도 동일하다.

남녀 사이의 kiss를 하게 되면 체온이 올라간다. 이 말은 남녀가 서로에게 정을 느끼고 흥분을 한다는 것이다. 즉, 더 발전된 관계를 가고 싶어한다는 말.  

 

청년들에게 "나 자신을 믿지 말라" 고 말해주고 싶다.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있는 환경 자체를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의 계명을 따른다"고 했다. 자발적으로 따른다는 말이다.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겠는가? 

"모텔을 가는데, 이길 힘을 주옵소서" -> 이게 말이 되는 기도라고 생각하는가? 자발적으로 모텔로 가는 발걸음을 돌려야하지 않겠는가?  

 

어떤 면에서 회개라는 단어에 진중함이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회개를 비아냥 거린다고 해서 예수 피의 힘이 약해지는가? 우리 스스로 예수 피의 힘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를 바란다. 구원의 참 맛을 느낀 사람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의식처럼 회개를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 
 

 

"성기 삽입만 하지 않으면 성관계 아니냐는 것 아니냐?" 라고 용인을 해버리면...? 
이 질문 자체가 성경을 향해 있지 않다.

위 처럼 용인을 하면 "피임했기 때문에 생명이 아니다, 낙태해도 된다"... 등등의 논리로 확장되어 더 큰 죄로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성기 삽입 직전에서 멈출 수 있는가? 그리고 멈출 수 있다면 혼전순결을 지킨 것인가?  
성경은 의인이 한명도 없다고 했다. 당신이라고 성기 삽입 직전에 멈출 수 없음을 기억하라. 

 


 

누군가는 이를 알려줘야 하니까 강사님이 이를 전하는 것이다. 듣기 거북한 거 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를 설명하고 비극을 막아야 하니까 이렇게 전하는 것이다. 

 

 

"성관계는 결혼 후에 배우자와만 하는 것"

 

이 sentence는 시대착오적, 역행적 발언일지 모르나, 
예수님은 결혼을 신적인 제도라고 말씀하신다. 결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백성의 관계가 드러난다. 

결혼의 목적은 유물론적 행복이 아니라 거룩이다.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이다.

사단은 이걸 아니까 사람을 그렇게도 오염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이신 걸 아니까 자유방임적 사랑을 진짜 사랑이라고 속삭인다

 


미디어로, 컨텐츠로 그렇게 더러워진 세상에 노출된 당신이 배우자와 거룩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라. 

도리어 거룩함으로 돌아서라.

유물론적 symbol이 넘처 흐르는데, 당신은 어째서 그 수도꼭지를 콸콸 틀어놓으려 하는가? 

먹는 게 '나'라는 말이 있듯, 보는 게 '나'다. 눈을 지켜라. 성경을 보는 시간을 늘리고, 내가 보는 것에 절제를 가져가라. 

세속적 미디어에서 돌아서라. 

 

 

특히 빨리 결혼할 것을 추천한다.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고 준비가 된다면 20대 중반에 결혼하라. 

 

빨리 결혼하면 재정적으로 부담되지 않냐고? 

타성에 젖지 않을 때부터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서사가 매우 좋다. 

내가 재정적으로 부족할 때도 두 사람이 함께 커가는 시간이 그만큼 소중할 수 있다. 

실제로 결혼생활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영성이 나오기 때문이다. 

 

"결혼을 늦추려는 본질적 이유가 내 원함인가, 하나님의 원함인가" - 이 질문에 답해보기 바란다.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다. 이게 창조의 목적이다. 사단이 이걸 알기에 생육하고 번성하는 걸 그렇게 막는 거다. 

 


 

 

Q: 왜 혼전 순결을 지켜야 하나요? 

A: 여기서 자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이 문제는 마음 속 선악과 문제다. 하나님은 모두 허락하셨으나 선악과를 금하셨다. 

선악과는 영수증과 같다. 우리의 본분을 깨닫게 하는 영수증. 
C.S 루이스는 자식을 너무 사랑했기에 자식이 어릴 적 방청소를 대신 해줬다고 했다. 하지만 몇 살이 넘어가자, 빗자루를 맡기며 방청소할 수 있는 권리를 자식에게 주었다고 했다. 본질적으로 권한을 넘겨준 것은, 청소할 권리와 청소하지 않을 권리를 모두 준 셈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 안에서 다양한 것들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단 하나. 성관계는 결혼 후에 배우자와만 하는 것이라고 정하셨다. 

 

성경에 혼전 순결이라는 말이 안나온다고 반박할지 모르나, 성삼위일체라는 말도 안나온다. 

성경은 혼전 순결을 지지한다. (글쓴이: 그 관계가 온전한 화합, 한몸됨을 의미하기 때문)

 

혼전순결을 지키지 못했더라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하라고 성경은 말한다. 혼전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고 과거에 매인 사람들은 자유해도 된다. 하나님이 순결하다고 하면 순결한 것.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은 아무리 붉은 죄도 양털처럼 희게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하나님은 내 죄를 기억치도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 분은 모든 허물을 덮으신다. 


신호체계를 위반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신호체계를 없애는 건 말이 안된다.
체계는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체계를 입증하는 '입증자'가 되어야 한다.  


역사에서 감추고 싶을 과거를 사도바울은 드러낸다. 은혜 때문에. 

내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니까. 

 


 

Q: 호감가는 이성이 있다면 어떻게 다가갈까요?  

A: 좋으면 좋다고 말하라. 너무 딥하게 넘어지지 말고.. 용기를 내서 말을 하라. 신앙을 섞지는 말고 용기 내서 말하라. 

 

 

 

Q: 결혼은 하고 싶지만, 연애를 하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세상에서 보는 데이트적 개념으로 보는데, 상대방의 신앙관을 알아갈 수 있는 대화의 시간. 결혼 전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다. 연애를 할 때 진지한 마음으로 연애를 임하라. 

 

 

 

Q:  결혼해야하는데, 연애에 관심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내가 생각하는 연애관을 그리스도 앞에서 다시 생각하고 사람들을 만나길 바란다. 

 

 

 

Q:  선을 보고 결혼할 수도 있는 건 아닌가요? 

A: 연애는 결혼을 준비하는, 상대를 알아가는 과정임을 기억하라. 

 

 

 

Q: 성관계를 해서 관계를 회복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까요?   

A: 다시 돌아갈 수 있다. 보혈의 능력은 우리를 깨끗게 하기에. 예수 사랑의 절대 진리가 살아있으면 된다. 그러면 우리가 달려갈 지표가 생기니까. 같이 사랑했던 서사를 특별히 여기고 빨리 결혼을 하는 것도 좋을 것.

 

 

 

Q: 신앙의 깊이가 다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신앙의 깊이는 하나님이 만들어가시는 것.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면 더 자유할 것 .

 

 

 

Q: 결혼을 빨리 하고 싶은데, 경제적 상황이 여의치 않는데, 얼마나 준비해야 하나요? 

A: 돈을 무시할 수 없지만, 주요 고려 사항이 아닐 수 있다. 

결혼을 할 때, 경제적 상황이 짐이 되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향해 품고 계신 꿈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인생의 청중은 여호와 하나님 한분 뿐이다." 라는 마음을 갖고, 선교의 시대를 살기 바란다. 

예수를 믿을 때는 댓가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연애를 하려면.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야 한다. 

 

결혼은 끝이 아니라, 두 사람이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시작이다. 

 

 

적용 찬양: 나는 믿네

 
나는 믿네
아티스트
사랑의교회
앨범
2017-2018 내 영혼의 풀 콘서트 Vol.14
발매일
1970.01.01

 


오늘 내용은 굉장히 직설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야말로 오늘날 청년들이 들어야 할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성적 가치관이 투영된 미디어와 컨텐츠가 양산되고 있는 오늘날, 남녀노소 누구하나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세상 문화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성적인 문제 앞에서 자유하지 못합니다. 너무 쉽게 무너집니다. 예수님 없는 영적 싸움은 백전 백패입니다. 저도 백번, 아니 수 천번 넘어졌습니다. 하지만 진짜 그리스도인은 수천번 넘어져도 일어서는 사람입니다. 천번을 넘어져도 악착같이 일어나는 사람입니다. 또 실패했다는 패배감 때문에 그대로 누워있고 싶더라도, 실패한 사실이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 모두 다 리셋시켜버리고 싶더라도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저는 강사님의 모습이 멋있어 보였습니다. 순리를 역리로 만들고 역리를 순리로 포장하고 있는 세상을 향해 과감히 소리치는 모습이 멋있었습니다. 세상 문화에 서서히 죽어가는 청년들을 살리기 위해 몸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강사님 같은 스피커가 되고 싶습니다. 세상의 죽어있는 청년들을 살리는 스피커가 되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오늘날 스피커로 활약하고 계신 분들께 받은 은혜가 있어서 입니다. 사랑의교회에서 만난 강사님(오늘 강사님을 포함해, 2주 전에 오신 채영광 교수님, 현승원 의장님이 떠올랐습니다.), BoB에서 만난 멘토님을 통해 죽음만을 향해 달려가던 제 인생에 제동이 걸렸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받은 은혜를 세상에 흘려보내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둘째, 제 마음에 소명(calling)을 계속해서 주시기 때문입니다. 대학부에 처음 올라온 새돌 시절 참석했던 '다시 회복하라' 2020 겨울 수양회 둘째날 오전 설교를 들으면서 제 평생 처음으로 가슴 밑바닥부터 차오르는 뜨거움을 느꼈습니다. 눈물이 계속 차올라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그건 슬픔이라는 감정도, 죄송함이라는 감정도, 억울함도, 스스로에 대한 동정도 아니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세상에 파묻혀 죽어가는 청년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공동체에 대한 뜨거움이었고, 때때로 그 마음을 다시 불어넣어주시는데 오늘 집회 후 기도할 때도 그랬습니다. 

 저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현승원 의장님처럼, BoB 지한별 멘토님처럼요. 제가 속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며 매일매일 악착같이 일어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사람이 되어 최정점에 올라갔을 때, 남들이 보기엔 가장 좋아보이는 것을 내려놓는 용기를 보이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르다는 것을 보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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