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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ermon Note

4.23 사랑의교회 대예배 & 대학1부 설교

by SeolLab. 2023.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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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깊이 측정(부제: 지성소 신앙의 은혜)"
(에스겔 47장 1-5절) 오정현 목사님

요약: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와 죽음, 그리고 주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을 측정함으로써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내어드릴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가 있는 어느 곳에서든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불러드릴 수 있다. 

 

1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
2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꺾여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오른쪽에서 스며 나오더라
3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쪽으로 나아가며 천 척을 측량한 후에 내게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4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5 다시 천 척을 측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1 Afterward he brought me again unto the door of the house; and, behold, waters issued out from under the threshold of the house eastward: for the forefront of the house stood toward the east, and the waters came down from under from the right side of the house, at the south side of the altar.
2 Then brought he me out of the way of the gate northward, and led me about the way without unto the utter gate by the way that looketh eastward; and, behold, there ran out waters on the right side.
3 And when the man that had the line in his hand went forth eastward, he measured a thousand cubits, and he brought me through the waters; the waters were to the ankles.
4 Again he measured a thousand, and brought me through the waters; the waters were to the knees. Again he measured a thousand, and brought me through; the waters were to the loins.
5 Afterward he measured a thousand; and it was a river that I could not pass over: for the waters were risen, waters to swim in, a river that could not be passed over.
(Ezekiel 47:1-5, KJV)

일주일 168시간 가운데, 주일 예배 2시간이 가장 피크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나머지 166시간에 영적으로 승리할 수 있다.


신앙은 년수(길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깊이에 의해 결정된다.
시편 1장 3절에,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 1:3)" 라고 한 이유도, 그 나무가 시냇가에 뿌리(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이는 그 깊이를 보여준다.)
에스겔서에 나오는 많은 환상 중에, 특별히 유명한 환상에는 두 가지가 있다. 마른 뼈가 되살아나는 환상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오는 물 환상(오늘 본문)이 그것. 환상은 우리 인생의 고난과 어려움이 있을 때 일어난다. 낙관론을 펼치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놀라운 하늘의 비전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 오늘 본문에, 성전에서 나온 물의 깊이가 깊어지는 상황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는가?
    옛날 어른들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곤 했다.
    1) 물이 발목으로 간다, 2) 물이 무릎까지 간다, 3) 물이 허리까지 간다, 4) 물이 온몸을 다 감싼다.
    1)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신앙
    2) 무릎으로 기도하는 신앙
    3) 주님 앞에 허리를 굽혀 봉사하는 신앙
    4) 깊은 은혜의 단계를 체험하는 신앙

  • 성전 뜰 신앙-> 성소 신앙->지성소(대제사장만, 그것도 1년에 한 번만 대속제일에 들어갈 수 있는 곳) 신앙    
  • 바울도 이에 대해 말한 적 있다.
    젖 먹는 신앙(딱딱한 말씀을 받을 줄 모르는 신앙), 단단한 음식을 먹는 성숙한 신앙으로 신앙의 단계를 나눌 수 있다. 

  • 목사님은 제자훈련을 통해 성도들이 성숙하길 바란다.
    우리 교회는 4종류로 성도의 신앙을 분류할 수 있다.

    1) '라'군: 주일에 가끔씩만 예배 나오는 신앙
    2) '다'군: 주일 예배에 지속적으로 나오는 신앙
    3) '나'군: 주일 예배에 지속적으로 나올 뿐 아니라 제자훈련을 받는 신앙
    4) '가'군: 영적 재생산에 참여하는 신앙(리더로 섬기며 양육하는 신앙)
  • 우리 교회도 새 가족이 들어오면 성경을 잘 알도록, 예수님을 잘 알도록, 믿음이 무엇인지 알도록 제대로 훈련시킨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마심으로써 더 깊은 자리에 갈 수 있게 된다.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은 자신의 죄와 자기 가족의 죄를 대신할 송아지를 준비하고, 따로 두 마리의 숫염소를 준비한다. 제비를 뽑아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신하고 다른 한 마리는 모든 민족의 죄를 대신하게 해 광야로 내쫓는다.(아사셀을 위한 염소) 광야로 내쫓긴 염소는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데, 그 염소는 모든 민족의 '죄' 그 자체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사셀에게 바칠 염소

 하지만 신약시대에 와서 그 속죄제물 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희생당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제물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 은혜를 깊이 깨달아야 한다.
그 은혜에 대한 깨달음, 곧 우리의 신앙의 깊이는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가? 


첫째,  자기 십자가와 자기 죽음을 측정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 5:24)
And they that are Christ's have crucified the flesh with the affections and lusts. (Galatians 5:24, KJV)"

둘째, 주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을 측정해야 한다. 
우리가 고난 때문에 아파할 때, 그 아픔 때문에 이전보다 더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그 고통 때문에 주님을 더 사랑한다고 고백하길 바란다. 주님이 베드로에게도 묻지 않았던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오늘날의 지성소는 어디인가?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가 있는 곳이 지성소다. 심지어 길을 가다가도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면 그곳이 바로 지성소다.
과거와 같이 지성소는 물리적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우리는 왜 교회를 나오는가? 우리는 왜 특새의 자리를 사모하는가?

우리는 그곳에서 우리를 온전히 주님께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내어드릴 때, 내가 거하는 모든 곳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불러드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 Love and Romance (8) - 마지막 이야기: 사랑의 원천 "
(요한일서 4장 7-10절) 김지수 강도사님

 

한 줄 요약:

 집착, 조급억눌림외로움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에서 자유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하며,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는(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을 만나는 은혜를 허락하실 것이다.  

 

 


7 사랑하는 자 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7-10)
7 Beloved, let us love one another: for love is of God; and every one that loveth is born of God, and knoweth God.
8 He that loveth not knoweth not God; for God is love.
9 In this was manifested the love of God toward us, because that God sent his only begotten Son into the world, that we might live through him.
10 Herein is love, not that we loved God, but that he loved us, and sent his Son to be the propitiation for our sins.
(1 John 4:7-10, KJV)


 사람은 사랑을 하고 싶어 하고,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반대로 자신은 사랑이 필요 없다는 식으로 도도한 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아도취와 나르시시즘에 빠진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하고 사랑을 갈구한다. 인간만큼 갓난아기 시절이 취약한 동물이 없는데, 인간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자신을 알아주고 도움 주길 원하지 않던가?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울어재낀다. 자신의 필요를 채워달라는, 도움을 달라고, 관심을 달라고 요청하는 행위다.)

 현대사회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인간이 조작할 수 있다는 생각을 주입한다. 노력하면 누군가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외모를 가꾸어 상대의 환심을 얻으려 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주도권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화를 하다 보면 어딘가 결여가 된 것 같은 친구들이 있다. 일명 '발작 버튼'을 가진 사람. 자신에게 민감한 영역을 이야기하면 급발진하는 사람. 부모님의 사랑을 덜 받은 사람들에게서 종종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 (이들은 연애와 결혼에 실패하는 경우가 다수다.) 또한 자신의 모습에 빠져, 자신에게는 사랑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앞서 자신은 사랑이 필요 없다는 식으로 도도한 척을 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솔직히 나도 여기에 해당하는 것 같다.)


 이처럼 사랑을 컨트롤하지 못해 좌절감을 느끼는 경우자기도취에 빠져 사랑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 모두 결핍으로 인한 잘못된 사랑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1. 첫째로 내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오늘 본문의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을 살펴보자. 이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 사랑을 보이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 인간의 사랑은 이기적이다. 내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사랑일 뿐, 내 만족을 얻기 위한 사랑일 뿐이다.(감정적 만족) 


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호11:8-9) -> 하나님은 자신이 변하지 않기에, 자신의 불붙듯한 사랑을 이어가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일들을 할 때가 많다. 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이스라엘을 창녀에 비유하는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했고, 그 사랑으로 채움 받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해, 그 공허함을 세상의 '사랑'으로 채우고자 한다. 이 세상의 '사랑'은 군것질 같은 것이라, 단기적으로는 내게 만족을 줄지 모르나, 장기적으로 내게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 또한 이는 나의 결핍을 온전히 채우지 못하는 것들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내게 채우는 것이 모든 관계의 출발점이다. 나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한다.

2. 두 번째로 내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ex) 두 사람 사이, 고백문제는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나중에 '너가 먼저 고백했잖아'라고 말하는 우위를 점하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베푸신 사랑의 방법은 먼저 희생하는 자세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10)"

 우리가 사랑하다가 헤어지는 이유는 섭섭함 때문이다. 그리고 부모님의 결핍이 우리 행동에 똑같이 투영되어 연애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 역시 연애를 하는 친밀한 관계 속에서 부모님의 단점이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 자신의 희생보다 상대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태도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행복하고 건강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우리는 연애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꿈꿔야 한다. 그럴 때,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실 것이다.


 ex) 외적으로 촌스러운 선배가 있었다. 그는 신앙적으로 성숙했고, 성격도 좋고 학업에도 열심히 있었다. 다만 유일한 단점이 촌스러웠을 뿐. 그 선배는 자신의 맡은 바 된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연애하는 선배를 발견했다. 두 사람은 "연애를 빨리 하고 싶다, 결혼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맡은 바 된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데 집중했다. 결국 이 둘은 결혼에 골인했다.
이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어땠겠는가? 이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결혼생활 아니겠는가?
이 둘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아이를 양육하지 않겠는가?

 열심히 섬긴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결혼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연애와 결혼을 잘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잘 섬기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데 집중하는 사람은 분명 하나님이 은혜를 허락하실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하고, 그럴 때 하나님이 모든 것을 더하실 것이다. 결국 우리 모두는 '결혼'을 할 텐데, 누구랑 할지가 더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적용찬양: 하나님의 그늘 아래

 
하나님의 그늘 아래
아티스트
어노인팅
앨범
어노인팅 예배캠프 2017
발매일
1970.01.01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먼저 거해야 집착과, 조급함, 억눌림, 외로움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 세상이 우리를 인정하지 않고, 부모님조차도 우리를 인정하지 않을 때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가 그 누구보다 귀하고,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 누군가가 나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해도 발작하지 않을 수 있다.
 집착하고 조급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갈망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그리고 그렇게 갈망하다가 하나님의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짝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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