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질문 있습니다"
(룻기 1장 16절) 박신일 목사님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1:16)
And Ruth said, Intreat me not to leave thee, or to return from following after thee: for whither thou goest, I will go; and where thou lodgest, I will lodge: thy people shall be my people, and thy God my God: (Ruth 1:16, KJV)
하나님은 선하십니까?
삶의 실상을 잘 생각해 보면서 대답해 보길 바란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선하다는 믿음은 정말 값진 믿음이다. 당신은 진짜 그러한 믿음을 가졌는가? 만약 그런 믿음을 갖지 못했다면 그 믿음에 이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을 통해 알아보자.
하나님이 정말 선한 분이라면 고난을 안 주시는 게 맞고, 우리가 기도하는 대로 응답해주셔야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의 중심에는 내가 항상 서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그분의 모습은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다른 경우가 너무 많다.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룻1:1-2)
나오미의 가정은 소박한 꿈을 가지고 이주했다. 허나 이들은 비극적인 상황에 직면했고 그들의 꿈은 좌절된다.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룻1:3-5)
세 여인만(나오미, 오르바, 룻)만 남았다.
이처럼 룻기의 도입부는 죽음으로 시작한다.
우리의 꿈은 진행형인가, 깨어졌는가?
하나님은 분명 선하신 분인데 우리 삶의 현실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선하신데, 아무것도 안 하실 때가 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나오미 가정의 소박한 꿈을 좌절시키시고, 그대로 방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 본문을 두고 솔직하게 질문하기 바란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마음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한 바람직한 자세 중 하나가 바로 '정직'한 것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8:32)
우리는 이 말씀을 부정하지 않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 집안에 당한 고난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보면 그 분께 의문이 들지 않겠는가? 우리 삶의 현실은 이토록 어려울 때가 많다.
그런데도 룻은 1장 16절에서 믿음의 고백을 한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1:16)
이러한 룻의 믿음은 시어머니 나오미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오늘 요지는 이게 아니다.
(오늘 본문은 약간 훼이크 같다. 오늘 설교에서 주목할 부분은 룻의 믿음이 아니라 나오미의 믿음이다.)
19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룻1:19-21)
나오미는 전능자가 자신을 심히 괴롭게 했다고 한다. 나오미는 개명까지 할 정도로 힘들었던 것.
아이러니컬하다. 분명 룻에게 하나님을 알려준 것은 나오미였는데, 막상 고난의 상황에선 나오미보다 룻의 믿음이 더 좋아보인다. 그럼에도! 모태신앙의 믿음을 절.대. 무시하지 말라. 겉으로 보기엔 나오미가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 같지만, 그녀는 하나님께 질문하고 있었다.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가 내 꿈이 완성되는 것, '행복'이라면... 정말 위험하다. 믿음의 선배들도 신앙생활 가운데 어려운 일들이 많았기 때문. 내가 잘 되는 것이 내 신앙은 순간적으로 우상숭배로 바뀐다. 예배시간 가운데 하나님이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나의 모든 꿈을 이뤄주길 바란다면 그건 예배가 아니다. 우상숭배다.
하나님께서는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식 내 꿈을 깨뜨리신다. 어떨 때는 산산조각 내신다. 이런 분이 선하다는 말이 가능이나 한 말인가? 당신이 선하다고 답한다면 그렇게 답한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만약 당신이 아무런 이유 없이 산산조각 내시는 분이 선하다고 말한다면 이는 재앙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 대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나의 꿈이 깨어지고 고난이 길어지면 내 믿음이 깨어지는 것처럼 느껴지고, 하나님께 의문이 생긴다.
그런데 진짜 그런가? 어쩌면 이건 나의 진짜 믿음이 깨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포장했던 껍데기 믿음이 깨지는 것 아닐까?
우리의 껍데기 믿음은 깨어져야 한다. 껍데기 믿음이 깨질 때, 한 가지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다름 아닌 주님. 나오미가 처절한 고통 속에서 한 가지 붙든 게 있는데, 그건 주님이었다.
우리의 세상적 꿈이 깨어져 나갈 때, 우리의 꿈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보게 된다.
'제럴드 싯처' 는 <하나님 앞에서 울다> , <하나님의 뜻> 라는 책의 저자다.
그는 교통사고로 아내와 막내 딸과 장모님을 잃었다. 그는 오랜 시간 고통스러워했고, 하나님께서 정말 살아계시다면 자신을 어떻게 이렇게 방치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하나님은 아내와 자신의 막내딸이 죽을 것을 알고 계셨는가?'
'이걸 알고 계셨다면 나는이 결혼을 하는 게 맞았던가?(왜 나를 이렇게 방치하셨는가?)'
그는 오랜 시간 끝에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내를 주셨고, 귀한 막내딸을 주셨다.
세명의 자녀를 홀로 키우는 동안 주님이 우리를 돌보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살 수 없었다. 나는 하나님을 믿기로 결정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결단했다. 우리 집에 이런 비극의 속에서도 하나님은 구속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계신다.
아무것도 없이 돌아온 나오미와 룻.
이삭을 주으러 가겠다고 한 룻,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보아스를 만난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룻1:22)
나오미는 하나님의 다른 뜻이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는 그 뜻을 너무 잘 안다. 한국 사람들은 드라마를 자주 챙겨보기 때문에 1장만 읽어도 4장의 내용을 정확히 추측할 수 있는 은사가 있다. 룻과 보아스의 결혼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룻과 보아스가 단순히 결혼했다는 드라마로 끝나지 않고 룻의 자손으로 다윗, 그리고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하나님께서 감추신 소망의 계획이 드러난 것이다.
"네가 다 망했을 때도 주님은 소망이 되신다. 주님은 네 절망의 날에도 소망이 되신다." 당신은 이를 확신할 수 있는가?
내 꿈이 깨어질지라도 주님은 역사하신다. 우리가 절망할 때, 우리의 진짜 기쁨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은혜 누리길 바란다. 이 땅의 모든 즐거움은 그림자라고 했다. 그런데 그림자가 없는 영원한 기쁨은 주님밖에 없다. 그 깨어지는 상황 속에서 진짜 기쁨이 무엇인지 알려주시기 때문이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렘2:13)
For my people have committed two evils; they have forsaken me the fountain of living waters, and hewed them out cisterns, broken cisterns, that can hold no water. (Jeremiah 2:13, KJV)
이스라엘 백성의 두 가지 죄악은, 하나님을 버린 것과, 자기가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이다.
'잔느 귀용'이라는 여성은 그의 책에서 고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겨울나무가 되는 시간이라고.
여름 나무는 가지가 안 보일 정도로 무성하다. 그런데 겨울이 되면, 그 이파리가 다 떨어지고 가지만 남는다. 겨울 나무의 초라한 모습이 다 드러난다. 우리의 모습에 비춰볼까? 고난을 겪을 때, 내가 치장했던 것들이 다 사라지고 내 실체가 다 드러난다.
하.지.만. 여기서 실망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고난 앞에서 교리나 지식으로 대답할 수 있다. 마치 공식처럼 답하는 정도의 수준은 가능하다. 욥이 1장에서 입으로 범죄 하지 않듯이.
하지만 고난이 길어지면 진짜 믿음으로 승부를 보아야 한다. 이러한 믿음은 눈물의 기도를 통해 이를 수 있다. 우리는 눈물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질문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아우성 치며 원망하기도 한다. 우리의 모습이 날 것 그대로 드러난다.
그럼에도 나오미는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고 물고 늘어졌다. 이것이 그녀가 가장 잘한 것이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한테 원망을 늘어놓지 않고 주님께 질문했다.
겨울나무는 이파리가 하나도 없다. 가지가 없는 나무는 산 것인가, 아니면 죽은 것인가. 당연히 살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럼 살아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뭔가. 간단하다. 뿌리가 박혀있기 때문이다. 겨울나무는 생명력이 가장 강한 나무다. 왜냐하면 여름 나무는 잎사귀를 피우는 데에 그 생명력을 소모하는 중인데, 겨울 나무는 그 모든 생명력을 뿌리에 모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봄이 오면 다시 싹을 피울 수 있다. 겨울나무는 봄이 되어 열매를 맺고자 생명력을 모으는 시간을 가진다. 그 시간은 나무의 겉치장을 다 벗겨내고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만드는 시간이다. 나무는 그 시간동안 가장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봄을 기다린다. 하나님은 그 나무를 더 강하게 만들어 잎사귀를 맺도록 준비시키신다.
보라. 껍데기, 치장했던 것들은 다 사라진다. 껍데기 믿음은 죽지만 진짜 믿음은 죽지 않는다. 한겨울이 와도 믿음은 절대 죽지 않는다. 나오미의 믿음은 죽은 게 아니었다. 기억하라. 우리는 겨울을 통과하는 중이다. 그리고 겨울을 통과한 후에 열매를 멋지게 맺을 것이다. 고난이 오면 나를 포장하던 것들은 다 떨어지지만 내 믿음은 죽지 않고 더 자랄 수 있다. 겨울은 나무를 죽이는 계절이 아니라 나무를 더 강하게 만드는 계절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 이야기를 하겠다.
예수님께도 나오미처럼 힘든 시간이 있었다.
주님은 늘 기도하러 가시던 감람산에 가셨다.(겟세마네 동산.)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육신의 모습을 가지고 계실 때 이 잔을 가능하면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신다.(이는 나오미의 소박한 꿈과 일맥상통한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우리가 이번 한 주간 안 아프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성경이 보여주는 결론은, 거절이다. 죽게 하신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기도하는 꿈이 철저하게 깨지는 곳이 바로 감람산이다. 이 꿈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던가? 하지만 그것이 정말 '끝'이었는가? 예수님의 꿈을 깨뜨리는 산만이 감람산이 아니다. 그곳은 소망의 산이 된다. 예수님은 그 산에서 부활하신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승천하신다.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행1:11-12)
감람산은 예수님이 눈물로 기도했지만 거절당했던 곳이고, 부활과 승천이라는 더 큰 꿈이 이뤄진 곳이다.
우리가 눈물로 기도하며 슬퍼했던 곳이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이 드러나는 곳으로 바뀔 것을 소망하라.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이 놀라운 영광을 일으키실 것을 기대하라.
나는 절망 중에 있고 다 망해가지만, 주의 영광을 나타내 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겠는가?
예수님은 울면서 그 산에서 기도하셨고, 그곳에서 승천셨으며,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우리 각자의 감람산이 있을텐데, 그 산이 그저 내가 망하고 끝난 산이 아니라, 내 믿음이 자라는 산이 되길 축복한다.
"순종하는데도 하나님께서 슬퍼하시는 삶"
(사도행전 10장 34-35절) 김신천 전도사님(대학5부)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행10:34-35)
34 Then Peter opened his mouth, and said, Of a truth I perceive that God is no respecter of persons:
35 But in every nation he that feareth him, and worketh righteousness, is accepted with him.
(Acts 10:34-35, KJV)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위키백과는 그리스도인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한다. 사도 바울은 사울이었던 시절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으나, 예수님을 만나 이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게 된다.
베드로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는가? 베드로는 예수님께 물 위를 걷게 해달라고 해서 물 위를 걸었으나, 곧 빠진 사람이었다.(우리 1,5,6부는 지난 수양회 때 정명호 목사님 설교 함께 들은 사이다.) 또한 예수님의 수제자였으나, 3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다. 그런 그가 사도행전에 와서 엄청난 변화를 맞이한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듯, 성령이 강림한 이후에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말과 행동, 사역에 있어서 큰 변화가 그에게 있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깨달았도다"하고 외치는 부분이 나온다.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베드로는 두가지를 깨달았다. 하나님이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는 것,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것.(사무엘상과 요엘서에 이 내용이 나온다. 베드로는 이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 말씀이 정말 참된 말씀임을 실제로 경험했다.)
오늘 본문의 전문맥은 베드로가 보자기에 쌓여 내려온 부정한 것들에 대한 환상을 보는 부분이다.
이후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을 방문해 고넬료가 구원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구약에 이미 존재했던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단순 글이 아니라 살아있는 말씀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가 되는 경험이다.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행9:43)
이러한 내용이 9장과 10장에 거쳐 의도적으로 반복되는 것 같다. 왜일까?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는데, 왜 무두장이 시몬의 이름이 반복되어 나오는가?
무두장이는 가죽제품을 만드는 사람이다. 그래서 짐승의 가죽을 벗기고 지방을 없애는 고역을 해야 했다. 또한 죽은 짐승을 만져야 했기에, 당시 유대사회에서 배척받았다. 무두장이는 성전 출입도 금지했다. 이렇게 보면 왜 그가 해변가까이에서 살았는지 알 수 있다.
베드로는 부정한 일을 하고 있는 무두장이 시몬도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영가족이 될 수 있음을 믿었다. 그러나 그 역시 유대인이었다. 베드로의 머릿속에는 유대인밖에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방인이 없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순종했지만 동시에 불순종했다. 그는 순종했는데도 불순종했다. 오늘 본문은 열심히 순종했는데도 예수님이 슬퍼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베드로가 자신의 가슴을 치는 고백이다. 우리는 어디까지 순종을 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치워달라고 기도하나, 자신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해달라고 기도한다.
세상은 내가 원하는만큼만, 하고 싶은 만큼만 하라고 속삭인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라. 믿음의 선배들이,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육신의 원을 따라 하고 싶은 만큼만 했다면 어땠을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을 요청하신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 너머의 순종을 요청하신다. 공동체를 섬기고 눈물로 영혼들을 위해 진액을 쏟아내길 도전하신다. 정말 어려운 내용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순종의 선을 긋지 않고 그분을 따를 때,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은혜를 매일같이 부어주실 것이다.
27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29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행10:27-29)
27 And as he talked with him, he went in, and found many that were come together.
28 And he said unto them, Ye know how that it is an unlawful thing for a man that is a Jew to keep company, or come unto one of another nation; but God hath shewed me that I should not call any man common or unclean.
29 Therefore came I unto you without gainsaying, as soon as I was sent for: I ask therefore for what intent ye have sent for me?
(Acts 10:27-29, KJV)
주님이 말씀하시면 무엇이든 사양하지 않고 순종하는 믿음을 갖길 바란다.
날마다 순종 너머의 순종,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선 너머의 사랑을 갖길 축복한다.
적용찬양: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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