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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ermon Note

4.2 사랑의교회 대예배 & 대학1부 설교

by SeolLab. 2023.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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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 제물의 결심 We the Living Sacrifice"
오정현 목사님 (마태복음 27장 33~46절)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27:33-46)

33 And when they were come unto a place called Golgotha, that is to say, a place of a skull,
34 They gave him vinegar to drink mingled with gall: and when he had tasted thereof, he would not drink.
35 And they crucified him, and parted his garments, casting lots: that it might be fulfilled which was spoken by the prophet, They parted my garments among them, and upon my vesture did they cast lots.
36 And sitting down they watched him there;
37 And set up over his head his accusation written, THIS IS JESUS THE KING OF THE JEWS.
38 Then were there two thieves crucified with him, one on the right hand, and another on the left.
39 And they that passed by reviled him, wagging their heads,
40 And saying, Thou that destroyest the temple, and buildest it in three days, save thyself. If thou be the Son of God, come down from the cross.
41 Likewise also the chief priests mocking him, with the scribes and elders, said,
42 He saved others; himself he cannot save. If he be the King of Israel, let him now come down from the cross, and we will believe him.
43 He trusted in God; let him deliver him now, if he will have him: for he said, I am the Son of God.
44 The thieves also, which were crucified with him, cast the same in his teeth.
45 Now from the sixth hour there was darkness over all the land unto the ninth hour.
46 And about the ninth hour Jesus cried with a loud voice, saying, Eli, Eli, lama sabachthani? that is to say, My God, my God, why hast thou forsaken me?
(Matthew 27:33-46, KJV)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기의 '산 제물'은 '내'가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오늘 본문 속으로 들어가보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 (마태복음 1장 21절) -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대신 속죄한다는 말) 사명을 드러내는 구절인데, 오늘 본문이 바로 이 대속의 완성을 이르는 부분이다. 이 대속의 은혜는 우리가 어떤 출신 배경을 갖는지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미치고 있다.

오늘 본문 34절을 보면 예수님은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셨다. 쓸개 탄 포도주는 마취의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 안드셨는가?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의 찌꺼기까지 모두 당하시고자 안드셨다.

로마 병정들은 십자가 앞에서 무감각한 채로,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가져간다. 이들의 모습은 로마의 백부장의 모습과 대비되는데, 백부장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다. 마태복음 27장 54b 이는 진시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둔감할 때 발생함을 기억하라. 마치 로마 병정들처럼. 마귀는 우리가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지금도 계속 발악하고 있다. 세상의 고통으로 우리를 무뎌지게 만들고 세상의 유혹에 빠져 우리가 무뎌지도록 만든다. 십자가 앞에서는 중립이 없다. 십자가 앞에서 무뎌지거나 순전한 은혜를 누리거나, 둘 중 하나다.
사람들이 십자가 앞에서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무뎌지는 까닭은 내가 희생제물이 되려 하지 않고 다른 것으로 희생제물을 삼으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2,3인칭이 아니라 내가 십자가 은혜의 당사자인 1인칭이 되어야 한다.

1) 먼저 우리는 복음의 깊은 의미를 각성해야 한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 켈빈은 이를 두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죄 덩어리'로 만드셨다고 표현했다.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누추하고 타락한 것들, 모든 비참한 것들을 쌓아 올려 죄 덩어리로 만드셨으며 이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 옮겼다. 얼마나 비참했으면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셨겠는가? 현대 시간으로 낮 12시인 제육시에 온 땅에 어둠이 임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얼굴을 돌리셨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마태복음 27장 45절: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누가는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라"라고 표현했다. 완벽한 어둠 가운데서 5분만 있어보라. 사람이 미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한 일체셨으나, 죄 덩어리가 되는 순간 너무 처참해져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됨으로 취하지 않으시고 3인칭으로서 '라마 라마 엘리 사박다니'라고 외치신 것이다.(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

우리가 진정 그의 십자가 죽음에 참여한다면, 그의 죽음의 능력으로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우리 안에 있는 죄 덩어리가 죽게 되어 타락한 우리의 처음 본성이 더 이상 활기를 갖지 못하게 된다. -요한 칼빈 <기독교 강요>-
모든 신학 교리의 두 기둥이 있는데, 첫째는 인간의 '전적 부패'다. 두번째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의 문제가 해결된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역사한다.

2) 둘째, 주님을 더욱 사랑할 결심을 해야한다.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를 강권하기 때문이다.
결혼을 왜 해야 하는가? 혼자 신앙생활 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부부가 손을 맞잡고 이전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다. 4부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뭔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다.

3) 셋째,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고, 죄를 미워할 결심을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1인칭으로 가져야 할 고백이다.
우리가 어떻게 죄를 품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죄와 피나는 투쟁을 해야 한다. 완벽한 광채셨던 예수님께서 우리 때문에 완벽한 암흑을 경험하셨다. 그걸 아는 사람은, 신앙 양심이 생긴 사람은, 죄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죄와 투쟁해야 하지 않겠나? 죄와 '헤어질 결심'을 해야 한다.
우리가 죄를 왜 그렇게 미워해야 하는가?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요한계시록 7장 14절)"의 말씀을 따라 예수님의 의의 옷을 덧입기 위해서다. 그 의의 옷을 능욕하지 않기 위해서다.

"베드로후서 2장 22절: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베드로가 말한 대로, 우리가 이런 모습을 보여서야 되겠는가?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13:5)" 이 말씀을 기억하라. 물질 문제로 너무 고민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를 떠나지 않으실 것이다.

적용찬양: 웬말인가 나를 위하여

 
웬말인가 날 위하여
아티스트
Andy Joshua
앨범
사순절 고난주간 묵상 찬송가
발매일
1970.01.01





 

"Love and Rommance(5): 당연한 사랑은 없다"
김지수 강도사님(에베소서 4장 2절)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엡4:2)
With all lowliness and meekness, with longsuffering, forbearing one another in love; (Ephesians 4:2, KJV)

 


연애를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내가 뭔가를 준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사랑을 받을까 기대한다.
그래서 형제들이 집에 가서 쉬고 싶은데 여자 친구가 집에 데려다달라는 말에 마지못해 데려다주는 것 아닌가?
어째거나 연애 초기 말고, 연애 중반기 이후에 접어들면 '왜 나에게는 내가 준만큼 돌려주지 않지?'에 대한 섭섭한 마음이 생겨난다. 기대한 만큼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사랑하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한다.'

내가 상대를 사랑하고 상대가 나를 사랑하면 서로 주고 받는 게 당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내 만족이 채워져야 된다는 이기심이 전제되어 있으며 내가 주는 것보다 상대에게 내가 받는 것을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이신 사랑은 먼저 사랑하고, 온유하고 베푸는 것을 강조하셨다. 그는 우리에게 먼저 오셔서 사랑을 나타내보이셨음을 기억하라.

1) '겸손'이라는 단어는 통상 긍정적인 단어로 보인다. 그러나 이 단어는 우리가 추구하고 싶은 단어는 아니다. 왜냐면 우리의 권위가 낮아지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부부싸움의 발단도 여기에 있지 않은가? '이게 맞아'라는 식으로 나의 주장을 강화하고 내가 높아지려 하기 때문에 싸움이 나지 않던가?  
'사랑하면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지'라고 하는 말은 상대방에게가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해야 할 말이다. 겸손을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2) 온유. 자신의 온순함을 자랑하지 않는 성품이 온유함이다. 자기가 어떠하다고 자랑하며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연애를 하면서 가져야 할 태도가 바로 이 온유함인데, 연애 관계에서 온유함이 빠지면 가스라이팅과 폭력이 쉽게 나타난다.
누군가의 섬김이 당연한가? 누군가의 사랑이 당연한 것인가? 누군가의 섬김을 당연히 여기는 순간 상대방의 감정은 반토막이 난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밥해주는 것, 그걸 내가 감사해야 하지 않나?

3) 사랑은 오래참음이다. 절대 Rommance만이 아니다. 애틋함은 Rommance일지 몰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오래참으셨기에, 우리는 오래참음으로 상대를 사랑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았다면 그 은혜를 상대에게 베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은혜를 아는 사람은 은혜를 베푼다. 우리는 이 훈련을 해야 한다. 결혼은 항상 연애의 심화과정이다. 심화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하는 사람은 앞선 원리 원칙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다.연애에서 삐그덕거렸던 사람이 심화과정인 결혼에서 모든 것이 다 잘 풀리겠는가?

4) 용납함. 오래참은 사람은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용납함은 받아준다는 것. 결국 오래참음의 연장선이다.
ex) 도사님은 회피형의 사람이다. 관계 개선에는 최악의 사람이다. 관계를 개선하려면 감정을 풀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유형의 사람이다.
당신은 연애 상대를 용납할 수 있는가?



우리는 늘 '나는 누구를 만날 것인가'를 고민하는데, 우리가 진짜 고민해야 할 문제는 '나는 준비된 사람인가?, 그리고 누군가를 용납할 수 있는, 누군가를 받아줄 수 있는 그릇을 가진 사람인가?'다.
우리는 상대방의 섬김과 헌신을 당연시해서는 안되는데, 그건 그 섬김과 헌신이 사람의 희생과 온유함이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행동에 감사해야 하며 우리도 그렇게 상대를 섬겨야 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사랑의 방법이다. 상대방이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않더라도 의지적으로 상대방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보이신 사랑의 방법을 실천하는 길이다.

 

 

 

 

 

 

-지난 QnA 나눔-

 


Q: 여사친이 많은 남자친구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이건 여자친구의 신뢰가 부족한 것이자, 남자친구가 철벽을 잘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의 여자/남자친구가 되었다고 해서 그가 사역하는 것을, 그가 누군가를 만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된다. 연애를 하면 상대가 내 소유라고 생각하는데, 그 생각 자체가 틀린 생각이다. 상대방이 나와 헤어지고 다른 사람과 만날 수 있다는 여지를 열어둬야 한다. (결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애'다.) 만날 수 있고, 헤어질 수 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족쇄를 찬 상태가 아니다. -- 그런 의미에서 연애 사에서의 커플링은 성경적이지 않다. 결혼 후에야 커플링이 족쇄가 되며 이게 바람직하다.

Q: 연애를 하는 중에도 다른 지체들을 열린 마음으로 바라봐도 되는 것인가요?
A: 절대 아니다. 상대방에게 집중하며 이 사람이 결혼할 만한 상대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만약 그런 관계가 아니라면 분명 헤어질 수 있어야 한다.

Q: 나이가 들 수록 좋은 사람을 다 채가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나이가 27이상이면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찾아다녀야 한다. 결혼할 수 있는 상대를 찾아보고 소개팅을 해라.
자만추는 교만의 선봉이다. 자기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교만이다.


Q: 호기심이 생기지도 않는 사람에게 연락이 왔을 때, 만나봐야 하는가?
A: 만나보라. 그 사람에게 생각지도 못한 끌리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일 수도 있지 않겠나? 모든 것을 닫아두지 말고 대화를 해봐야 한다.


Q: 짝사랑할 때 상대방이 하나님보다 커지게 될 때가 있는데 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A: 제자훈련을 할 때 연애 하지 말라고 하는데, 하나님보다 상대가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건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상대와의 만남이 더 소중해지는 것을 의도적으로 경계하는 것이다.

개인 경건생활을 하는 와중에 무엇이 우선순위인지 발견하게 된다. 본인의 경건생활과 예배가 바로 되어있다면 하나님과의 무너진 관계는 회복된다.


마무리: 3주 정도 더 Love and Rommance 를 하고 마무리할 예정이다...
대학생 시기라 많은 지체들이 이렇게 관심 갖는 건데,(장년부만 돼도 별 큰 관심이 없다...) 부디 성경적 가치관을 가지고 연애할 수 있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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