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의 실체를 경험한 사람 Experiencing Real Revival"
오정현 목사님 (역대상 4장 9-10절)
9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대상4:9-10)
9 And Jabez was more honourable than his brethren: and his mother called his name Jabez, saying, Because I bare him with sorrow.
10 And Jabez called on the God of Israel, saying, Oh that thou wouldest bless me indeed, and enlarge my coast, and that thine hand might be with me, and that thou wouldest keep me from evil, that it may not grieve me! And God granted him that which he requested.
(1 Chronicles 4:9-10, KJV)
오늘의 말씀이 '내 것'으로 체험되길 바란다. 야베스는 '적당한 기도'가 아니라 '생명을 거는 기도'를 통해 부흥의 실체를 경험했다.
1. 야베스의 배경은 좋은 것이 아니었다.
역대상 3장에는 다윗이나 솔로몬의 계보가 나온다. 이후 4장에는 맹숭맹숭한 사람들이 나오는데, 갑자기 9-10절에 클로즈업 해서 나타난 사람이 바로 야베스다. 야베스의 형제들은 다 별볼일이 없었고, 그나마 괜찮았던 사람이 야베스다.
야베스의 아버지가 누군지 제대로 안 나올 정도로 출신이 좋지 않았다. 4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유다지파 가운데서도 비주류다. 9절 후반부에 보니, 야베스의 뜻이 '수고로이 낳았다', '고통'이다. 또한 10절에 보니 물려받을 땅도 없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다. 야베스는 가정적으로 일어나는 수많은 환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야베스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지체가 있다면 이 말씀을 통해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길 바란다.
2. 야베스의 부흥을 위한 기도
이 아뢰는 기도는 인생의 반전을 위한 기도다. '아뢴다'는 말은 생사를 걸고, 간절하게, 절절하게, 결사적으로, 전력투구해 하는 기도다. 야베스는 4가지 기도제목이 있었다.
1) "내게 복에 복을 더하여 주소서"(개역한글)
여기서 말하는 복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초자연적인 은혜다. 세상이 말하는 세상적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복은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깨닫는 것. 하나님을 더 알게 되고, 하나님이 하나님되심을 자각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2) "내 지경을 넓혀주시고"
인생의 기회도 놓치고 명예도 놓친 현실을 breakthrough하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
대한민국에는 second chance가 없는 나라, 반전이 없는 나란데, 복음의 능력이 들어옴으로써 second chance가 생겼음을 믿으라.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 건, 지경이 넓혀지는데서 출발한다.
3)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소서"
구약(신약도 마찬가지긴 하지만)에서 주의 손은 권능과 힘의 상징이다. 내 인생의 navigation이 되어주셔서 방향을 정해달라는 기도다.
4)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소서"
야베스는 어쩌면 우울증에 빠질지도 모르는 환난 가운데 처했을 듯하다. 이 자리에 비슷한 처지에 있는 지체들은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그야말로 샬롬의 평강을 누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를 신약판으로 해석하자면,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다.
야베스는 이 기도를 한번만 했을까? 응답될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자 10절b에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이번 특새 주제다.)
앞선 2장 55절을 보면 "야베스에 살던 서기관 종족..." (야베스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한 memorial 공간.)라고 했다. 하나님이 그의 삶을 높이 들어 사용하셨고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는 구절이다.
"복에 복을 더하여 주옵소서 =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소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소서". 그저 적당히 복을 아는 게 아니라 은혜의 바다에 담기길 바란다. 그래야 실체를 경험한다.
은혜의 실체를 경험한 브루스 윌킨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강가에 서서 하루하루를 버티기 위해 물 한컵씩 요구하던 사람이 강물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 -브루스 윌킨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이미 실패가 보장된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러니 우리는 주의손이 도와 사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러한 '주의 손이 도와 사는 인생'은 '하나님께 전적위탁을 받는 인생'이다.
요셉이 종 살이 하는 가운데서도 그의 삶은 절대 실패한 삶이라고 할 수 없는데, 그는 하나님이 함께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창39:2)" - 성경은 그가 잘 나갈 때가 아니라, 그가 노예살이 할 때 형통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도우심때문에 가능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특히나 남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중요시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짜 중요시해야 하는 것은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가다. 당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몇년만 지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중요한 건 '주의 손이 나와 함께 하시는지'의 여부임을 기억하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세상의 상식을 뛰어넘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다.
cf) 하나님 없이 로또 맞으면 축복이겠는가? 하나님 없이 로또 맞아서 끝이 좋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
"죄의 힘이, 죄의 횡포로 인한 고통이 우리 삶에서 기승부리지 못하도록 도와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자.
야베스가 살았던 이유는 일 때문이 아니라 기도 때문에 살았다.
정리해보자.
구약의 야베스와 신약의 우리를 비교할 때, 누가 더 축복받았는가? 야베스는 어린양을 그림자로 보았으나 우리는 실체로 본다.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감동이 특정 사람에게만 임하는 식이었고 그 영이 쉽게 떠날 수 있었다. 삼손이나 다윗을 보라. 그러나 신약에서는 누구든지 그 안에 생수의 강이 흐를 수 있게 되지 않았던가?
다음 구절을 보라.
로마서 8장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어주시지 않겠는가"
우리가 받은 복은 그리스도의 못박힌 손으로부터 나온 복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야베스보다 더 축복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마지막 하나의 걸림돌이 있다. 여러분들은 이를 인식만 하지 않고 체화하길 바란다. 참된 복을 받는 비결은?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다.
찰스 피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부분의 성도가 진정으로 부흥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렇게 되서야 되겠는가?
우리는 참된 복을 갈망해야 한다.
'게오르규 노이마르크' - 400여 년전 사람. 젊은 시절, 가고 싶은 대학이 있어 먼 길을 떠났다. 그런데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거지가 되었다. 연고도 없는 도시에서 무일푼으로 떠돌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야베스처럼 기도하라고 했다. 그러던 차에 목사님 한분이 지나가다가 그의 사정을 듣게 됐다. 그러자 목사님은 자신이 아는 판사 집에 가정교사로 취업시켜주었고, 후에 원하던 대학에 입학했다. 그 후 그는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라는 찬양을 작곡했다.
"Love and Rommance: 천생연분 Love Dive"
김지수 강도사님 (창세기 24장 63-67절)
63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64 리브가가 눈을 들어 이삭을 바라보고 낙타에서 내려
65 종에게 말하되 들에서 배회하다가 우리에게로 마주 오는 자가 누구냐 종이 이르되 이는 내 주인이니이다 리브가가 너울을 가지고 자기의 얼굴을 가리더라
66 종이 그 행한 일을 다 이삭에게 아뢰매
67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창24:63-67)
63 And Isaac went out to meditate in the field at the eventide: and he lifted up his eyes, and saw, and, behold, the camels were coming.
64 And Rebekah lifted up her eyes, and when she saw Isaac, she lighted off the camel.
65 For she had said unto the servant, What man is this that walketh in the field to meet us? And the servant had said, It is my master: therefore she took a vail, and covered herself.
66 And the servant told Isaac all things that he had done.
67 And Isaac brought her into his mother Sarah's tent, and took Rebekah, and she became his wife; and he loved her: and Isaac was comforted after his mother's death.
(Genesis 24:63-67, KJV)
뮤비"Love Dive":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로 들린다.
연애를 할 때 누구나 찰떡의, 천생연분을 만나길 원한다. 누구나 결혼을 앞두고 나에게 딱 맞는 사람을 만나기 원한다.
ex) 누군가가 첫사랑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초등학교 5학년 때라고 하겠다. 당시 한 친구가 좋다고 적극적으로 구애했다. 도사님은 내심 좋아했으면서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 친구가 어쩔수밖에 없이 전학가고 나니까 더 애틋해졌다.
또 한번은 대학1부에 처음 왔을 때, 공동체를 고백하는 가운데 한 자매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잠시잠깐의 설레임이었고 사랑에 빠지진 않았다.
우리는 모두 크리스천으로서 연애를 잘하고 싶다. 세상과 다른 연애는 뭔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예비해두신 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한다. 연애를 하고 싶다면 이 사람이 정말 하나님이 예비하신 짝이 맞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반쪽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답은 간단하다. 정명호 목사님이 말씀하신 주옥같은 단어다.
방향성과 자율성.하나님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자율성)
너무 방향성만 따지다가 적극적으로 대시하지 않는 건 옳지 않다. 하나님이 다 갖다 주실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이 있다면 나의 선택을 존중하신다.
ex) "오빠는 하나님이 준비해주신 딱 한명의 사람이야. 난 오빠 없으면 못살아." 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아내와 살면서 감사하고 행복하다. 하지만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랑 결혼했어도 하나님 안에서 감사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내게 주신 딱 하나의 사람이라는 명제는 틀린 말이다. 하나님이 "걔 아니야, 걔 아니라 얘한테 가야돼"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지금 내가 마주하는 사람들 중에 미래의 배우자가 있을 수 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사람이라는 고백과 동시에, 나에게 허락하신 자유의지를 통해 내가 선택한 사람이라는 인식에 기반한다.
=> 기독교는 운명론을 따르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을 존중하시고, 우리의 선택의 책임을 물으신다.
반대로, 그럼 아무나 붙잡고 결혼해야되는가? 이것 역시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내게 주어진 딱 한사람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내 배우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알아가야 한다. '쟨 아니야'라고 하는 게 아니라 '쟨 어떤 가능성이 있을까'하는 의문을 계속 가져야 한다. 내가 정해놓은 틀 때문에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배제하지 말라는 말이다. 왜냐면 운명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내 옆에 이 사람을 두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다양한 사람을 내게 두신 이유는 나는 어떤 사람과 잘 맞고 어떤 사람과 어떤 이야기를 할 때 더 성장할 수 있는지 실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면 안 만나겠다는 닫힌 연애관을 가지면 안된다.
결론: 그러면 누구와 연애를, 누구와 결혼을 해야 하는가?
-> '나는 어떤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해봐야 한다.
크리스천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삶'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다. 이게 목표인 사람은 배우자도 그런 목표를 갖길 바라지 않겠는가? 내가 썩어 없어질 것을 가치있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내가 연애하는 상대도, 썩어없어질 것을 가치 있게 여기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ex) 세상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다 본질적으로 비슷하다. 왜냐면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 역시 그렇게 산다면, 연애를 하면서 무엇을 꿈꾸겠는가? 뻔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만드실 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것을 꿈꾸셨기 때문에 가정과 결혼이라는 제도를 준비하셨다. 그렇기에 이 목적에 부합하는 결혼 생활을 할 때 행복할 것이다.
ex) 도사님이 보기에 아내는 귀엽고 사랑스럽다. 도사님의 이상형은 키가 크고 늘씬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침대 위에 같이 있는 사람은 평생을 꿈꿔왔던 이상형과는 반대의 사람이다. 20살에 아내를 만났다면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내와 평생을 같이 갈 수 있겠다고 마음을 갖게 된 이유는 아내의 성품 때문이었다. 도사님의 성격은 짜증이 많은 성격인데, 아내는 털털한 성격이었다. 이 아내와 함께 살면 하나님의 나라를 꿈꿔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그게 아내와 연애를 계속하게 된 결정적 계기다.
잠시잠깐의 안목의 정욕때문에 dive를 하지 말라. 그 깊이가 얼마가 될지 알 수 없다. 결혼은 '로맨스'처럼 보이고 아름다워보이지만, 실상은 인내와 절제와 온유함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잠시잠깐의 유흥거리가 아니다. 찰나의 감정 때문에 인생을 올인하지 말라. 오히려 가능성을 열어두고 지켜봐라.
QnA
Q: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 사람에게 연락이 오는데, 호기심이 없어도 감정을 가져야 하나요?
A: 그 사람이 가진 장점과 매력이 뭔지 알아보고 고민해볼 것 같다. 하지만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면 깔끔하게 정리해야 한다. 고민해봤는데도 이 사람이 별로 감흥이 없다면 정리해라.
'성적 과반응' - 이성의 반응에 과민하게 반응하고 좋아서 달려드는 것, 자기 스스로를 굉장히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자주 나타남.
Q: 신자와 결혼해야 하나요?
A: 비신자라면 최선의 노력은 전도겠다. 하지만 신자와의 결혼을 추천한다.
Q: 나는 호감이 없는데, 상대가 호감을 표시하면 어떻게 거절해야 하나요?
A: 애둘러서 표현을 했는데도 그렇게 행동한다면 눈치가 없는 친구니, '부담스럽다고' 확실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Q: 공동체에 있어서 덕이 되는 연애는 무엇인가요?
A: 눈쌀을 안찌푸리는 연애여야 한다. 어딜가든 달라붙는 연애가 되지 않기 바란다. 각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그 역할을 잘 감당하고 난 후에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는 것이 덕이 되는 연애다.
Q: 여러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더 좋은지 어떻게 알아요?
A: 여러가지 것들을 같이 해봐야 그 사람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다. 같이 뭔가를 하다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Q: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계속 관찰을 하고 20%정도를 알고 나서야 연애를 하는 것을 추천한다.
Q: 교회는 다 같은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거 아닌가? 누구나 다 만나면 안되나요?
A: 우리는 다 같은 방향을 향해 걷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답지 않게 연애만을 주 목적으로 교회 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Q: 삼초 dive를 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남에게 뺏기면 어떡해요?
A: 상대를 뺏길 수 있다. 누군가가 뺏어갔다면 그 또한 받아드릴 수 있어야 한다. 왜냐면 그 사람에게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상대는 그렇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 안에서 좋은 짝을 만날 수 있길.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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