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람을 세워가는 사도행전적교회, 혜성교회
"Surfing The Waves Of Crisis 2023 ep4.- 걱정이 아니라 믿음을 선포하라"
(출애굽기 14장 10-14절) 정명호 목사님

"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출애굽기 14장 13절) "
https://www.youtube.com/watch?v=9WZXF8xPmiE
출애굽기 말씀을 살펴보는 4번째 시간이다.
우리 삶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느껴지는 건, 이를 해결할 외적 자원과 내적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개가 다 있다면 문제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둘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문제해결이 쉽지 않을 것이다. 바다 위에서 서핑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 빠질 것이다. 바다 앞에서 두려움을 가진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반응을 하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나를 명하사 물 위를 걷게 하소서"라고 말했다. 문제상황에 맞서는 사람의 태도의 차이를 볼 때, 서로 다른 간증을 하게 된다. 누구는 배에서 끔찍한 파도를 보았다고 밖에 말 못 하나, 누구는 물 위를 걸었다고 고백한다. 그렇기에 진짜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 문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거셀 때는 삶의 돛을 조절하려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두렵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못한다고 해서 삶이 나아지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문제를 이길 하나의 방법이 또 있다.(내적 힘과 외적 자원 외에.) 바로 기도가 그것이다. 우리가 맞서야 할 문제가 능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 때 우리는 걱정을 하지 않지만, 내 힘을 벗어날 때 진짜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문제 앞에서 1)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일하심과 도우심을 구하며 엎드려 기도할 것인가, 아니면 2) 하나님이 나와 뭘 하시는지 모르겠고 원망하고 문제 앞에 두려워할 것인가, 이 두 반응 중 하나를 보일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는 분이다. 그러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 기도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야곱은 잔꾀로 살았던 사람이었고, 그 꾀가 통할 때는 그 꾀로 문제를 해결해 나갔으나, 그럴 수 없음을 깨달을 때, 그는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갔다. 벧엘에서,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라고 예배하지 않던가. 우리는 야곱의 잔꾀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기도했다는 것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다윗 역시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부르짖으며..."라고 기도했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107편 30절 우리 삶을 삼킬 것 같은 이 파도를 시편의 저자도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 물결을 넘어서서 잠잠케 하시고 소망의 항구로 인도하실 것을 믿었다.
목사님은 믿음은 의지적인 결단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가 전제되어야 하며,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가겠다는 1) 의지가 있어야, 그런 태도가 있어야 마귀에 맞설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확고한 결단을 가진 사람에게도 문제는 찾아온다.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성실하게 살고 있는 사람에게 삶의 과정 속에도 기쁨과 즐거움이 없을 수도 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재미나게 사는 것 같다고 생각되는데 그에게는 성실함과 근면함을 찾아볼 수도 없다. 성실해야겠다, 근면해야겠다는 의지는 있지만 내 안에 동기가 없어, 활력이 없어 무기력하게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렇기에 의지와 결단에 더불어 하나가 더 있어야 한다. 그건 바로 기도와 응답으로 인한 기쁨이라는 삶의 윤활유이다. 기도는 단순히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억지로 행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근거다. 기도하고 응답받는 것이 우리 기쁨의 원천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라.
연인들이 나는 당신을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고 말할 때, 성실함에서 끝나면 안 되고 주고받는 사랑의 말, 선물, 스킨십이 있어야 관계가 지속된다. 성도의 삶도 이와 같다. 하나님도 성실하고 나도 성실한 것이 우리를 견고하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by 성경-> 모래 위에 짓지 않은 집) 기쁨을 누리게 하는 원천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언어, 물질적으로도 채워주시며, 하나님께서 나를 어루만져주신다는 그 느낌에서 기쁨이 비롯된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마가복음 9장 29절)"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을 받지 못해 오히려 마음의 상심이 더 큰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기도를 아예 멈춰버린다면 진짜 하늘과 이어질 기회를 걷어차버리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때까지 엎드려 기도하는 것뿐이다. 우리에게 선택의 자리는 없다. 기도가 잘 안 된다면 최소한 기도의 목적으로 어떤 시간을 갖도록 해보라. ex) 광화문 현장의 시위대를 생각해 보라. 시위의 방법은 다양하다. 외치는 시위도 있지만, 침묵시위도 있다. 꼭 내가 외쳐야 시위가 아니라, 작은 판넬 들고 입 다물고 서 있어도 침묵시위가, 1인 시위가 된다. 외쳐야만, 길어야만 기도가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죽 치고 앉아있어도 기도가 됨을 믿어라. 내가 이 문제 때문에, feat. "이 열망 때문에 하나님 앞에 앉아있습니다."
내가 어떤 문제 때문에 죽치고 앉아 걱정되는 것들을 사람에게 계속 말하면 그건 불평이다, 하소연이다. 이 똑같은 행위를 하나님께 하면 기도가 된다!! 부모가 자녀에게 말할 땐 잔소리가 되는 게, 하나님께 내 염려를 말하면 그건 기도가 된다.
우리가 부담스러운 상황을 만나면, 우리의 반응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적인 행동을 따를 때가 많다. 긍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나, 불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바로 기도의 자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 "그래도 기도해야지", 아니면 "기도해야 하는 거 아는데, 근데..."라고 말하는 사람들... 우리는 어떤가? 우리의 마침표는 어디에 찍히는가? 우리는 이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 말해야 한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능히 하실 이에게(에베소서 3장 20절)" -> 목사님이 되게 싫어하는 간증표현: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딱 맞게 주셨다.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은 믿음의 부르짖음이 아니었던 듯하다. 10절에 모세를 원망하기 때문이다. 부르짖음 이후에 마침표가 찍힌 곳은 모세를 원망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는 이렇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어다" -> 모세는 걱정되지 않았을까? 아니다. 그도 똑같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말하고 있다. 문제가 아니라. 보이는 문제 앞에서, 예견되는 미래를 말하는 사람들은 대단히 똑똑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런 똑똑한 사람이 될 것이 아니라 예견되는 사람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영광을 나타내실까 말하는, 기대하는 사람 되길 바란다. 하나님은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하는 사람에게 역사하신다. 상황 앞에 내뱉는 우리 앞에 하나님이 얼마나 민감하신지 알아야 한다. 민수기 14장 27-28절에,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 (필자:우리는 흔히 x 됐다 는 말 많이 쓰지 않나?) 누구나 예견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그들 앞에 또 하나의 사실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불구름과 구름기둥이다.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불과 구름기둥이 있는데, 왜 그들은 하나님만 쏙 빼두고 문제만 이야기하나? 믿음은 상황을 안 보는 게 아니다. 상황도 보지만(당연한 상식적 판단), 하나님을 함께 보는 것을 말한다. 동일한 객관적 사실 가운데 나는 무엇을 더 기대할 것이냐 하는 말이다. 믿음 있는 사람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래도 하나님을 붙들겠다고 견디는 사람이다. 자연적 반응을 가지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두렵다는 반응을 하나님께 하라는 것이다! 말을 하되, 사람들에게는 무엇을 말해야 하나,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말하라는 것이다. 걱정은 하나님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말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와 선포는 하나님을 일하게 한다. 하나님의 일하심과 기적은 우리의 말과 행동, 입을 통해 달려 있다. 이 얼마나 불경한 말인가? 하나님 홀로 행하시는 분 아닌가? 그게 아니다. 출애굽을 보면 하나님이 기적을 막 행하시지 않는다. 항상 사람의 말과 행동을 하나의 사인으로 보시고 그것에 따라 행하신다. "모세가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 개구리가 집과 마당과 밭에서부터 나와서 죽은지라(출애굽기 8장 12-13절)" - 재앙을 일으키는 분은 하나님, 근데 그 시점은 모세가 말할 때, 구할 때 일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끌고 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앞세워 가시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를 말하는, 모든 염려거리를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사람 되자. 걱정된다고 사람들 사이에서 문제를 말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께는 문제를 말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라. 이집트 군대의 위용을 이스라엘 백성이 잘 알겠는가? 아니면 모세가 잘 알겠는가? 모세는 군대를 거느려보았던 사람이다. 전술도 아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백성은 구경해 봤어도 전술은 몰랐을 것이다. 때때로 자기 혼자 모든 것을 알고, 자기 혼자 이 상황을 꿰뚫고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우리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자녀들이 잘되라고 자녀에게 예견되는 문제를 온통 쏟아내는데, 그 결과는 자녀들이 위축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하나님이 너를 이끌고 가신다, 사랑하신다는 말을 해주어야 한다. 너의 성격도 하나님이 너를 타고나게 하신 거다.'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냐? 자녀들의 믿음을 우리가 깨뜨린 꼴이 된다.
상대방에게 말하고 그의 응답을 기다리듯, 하나님께 기도했다면 우리는 그 응답을 기다려야 한다. 그 기다림의 기간이 힘들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해야 할 세 번째 말이 있다. 3) 하나님이 일하신다. 신명기 1장 30절을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실 것이란 말씀이다. 그가 나를 버리지 않으시며 함께하실 것이란 말씀이다. 우리가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모세처럼 은혜의 통로로, 도구로 사용될 것이다. 우리가 문제를 말할 때마다 자기 자신뿐 아니라 사람들을 침체되게 만든다. 또한 그렇게 말할 때, 하나님께서도 일하시지 않는다. 우리 하나님은 불평 때문에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기도 때문에 일하신다. 그러니 하나님께 문제를 말하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말해라. 문제를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은 멍청이다. 일부러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바보다. 문제를 알아야 하나님께 말하지 않겠냐. 그러나 사람들에게 말할 때는 그 문제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실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말해야 한다. 염려 걱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말하며, 믿음을 선포하며 살길 말한다. 하나님과 가능성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사람 되길 바란다. 불안은 우리 가운데 있으나, 우리 안에 일어나는 걱정에게 말하라, '내 영혼아 왜 불안해하는가'라고.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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