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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PBS

여호수아 2장 1~11절 말씀 묵상

by SeolLab. 2024.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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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전쟁을 위해 쓰임 받는 사람”

[여호수아서 2장 1~11절]

1.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2. 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중의 몇 사람이 이 땅을 정탐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

3.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그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정탐하러 왔느니라

4.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이르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5.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을 따라잡으리라 하였으나

6.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7. 그 사람들은 요단 나루터까지 그들을 쫓아갔고 그들을 뒤쫓는 자들이 나가자 곧 성문을 닫았더라

8. 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1. 내용관찰

 

오늘 본문은 세부적으로 약 4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1절을 첫부분으로, 2~3절을 두번째 부분으로, 4~5절을 세번째 부분, 그리고 6~11절을 마지막 부분으로 볼 수 있다. 오늘 내용 전개 속도는 상당히 빠르다. 첫번째 부분인 1절에서는 여호수아가 정탐꾼 2명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는 내용이 나온다. 

이어 두번째 부분에서는 정탐꾼 두명이 가나안 땅으로 몰래 들어왔다는 소식이 여리고 왕에게 전해지는 내용이다.

세번째 부분에서는 기생 라합이 거짓말로 정탐꾼 두명을 숨겨주는 장면이 나온다.

마지막 네번째 부분에서는 라합이 이미 정탐꾼 두명을 숨겨준 상황을 설명하며, 왜 그렇게 행동하였는지 그녀의 고백이 담긴 내용이 등장한다.

이렇게 4부분으로 나눈 것은 접속사를 통해서이다. 오늘 본문을 영어 성경(특히 nasb version)으로 보면 접속사가 매우 많이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역개정에는 잘 등장하지 않던 접속사가 원어 버전을 잘 살린 nasb version에 잘 등장하는 것은 매우 특징적이라 할 수 있겠다. 먼저 1절은 1장이 끝난 후, 정탐꾼을 본격적으로 보내는 구절이 시작하기에, 'Then'이 사용되었다. 이어 2절의 시작은 'But'의 역접 접속사가 열고 있다. 이어 3절은 'so'라는 종속접속사가 사용된다. But과 So라는 접속사가 두 절에 걸쳐 연이어 사용된 것은 4절과 5절, 6절과 7절에서도 반복된다. 4절은 'But'으로 시작하고 있고, 5절은 'And'로 시작한다. 더 특징적인 것은 6절과 7절은 각각 But과 So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2절의 But은 '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첩자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전달하며 상황이 긴박한 상황임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이어 3절에 등장한 So라는 종속 접속사는 2절의 상황에 대한 여리고 왕의 반응을 드러내는 접속사로 사용된다. 이어 4절의 도입부에서는 긴박한 상황에 생각지도 못한 라합의 반응(거짓말)을 강조하기 위해 But의 역접을 사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물론 5절의 And는 라합의 거짓말 스토리텔링을 이어가기 위한 접속사이다. 6절에 사용된 But은, 라합의 거짓말의 내용과 다르게 실제로 라합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강조하여 드러내기 위한 접속사이고, 7절의 So는, 라합의 계략(?)이 어떻게 잘 들어먹혔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 사용된 접속사라 할 수 있겠다.

이로 미루어볼 때, 오늘 본문은 상당히 대칭적인 구조를 띄고 있다. 2절과 3절의 연이은 구조가 6~7절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다만 2~3절의 핵심 인물은 '어떤 사람, 여리고왕'인 반면, 6~7절부터는 '라합'으로 그 초점의 대상이 옮겨졌다.

오늘 본문에서 반복되어 나타난 표현을 몇가지 알아보자. 우선 '정탐'이라는 표현이 반복되고 있다. 당연하지만, 오늘 내용이 정탐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1절에서 '정탐꾼','엿보라'는 표현이 등장하며, 2절과 3절에 '정탐하러'라는 표현이 나온다. 하지만 재밌게도, 3절 이후의 4절부터는 정탐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데, 이는 이야기의 초점이 정탐(이라는 은밀한 행위)에서 '라합의 믿음'으로 옮겨가기 위한 글쓴이의 의도적인 배치로 해석된다.

(약간 억지같기는 하나) '숨기다'라는 동사가 4절에 이어 6절에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는 접속사를 통해 2절과 4절 6절의 형식이 유사하다는 내용과 더불어 4절과 6절이 라합의 구체적인 행동을 동일하게 강조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더 주목할 것은, 오늘 본문의 뒷부분의 9절과 11절에서 '두려워하다'의 변형들이 반복해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먼저 9절에서 '두려워하다', '간담이 녹다'는 표현이 나오고, 11절에도  '마음이 녹다', '사람이 정신을 잃다'는 표현이 있다.

또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나 두명의 정탐꾼은 여호와에 대한 이야기를 일절하지 않고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 라합은 '여호와'또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5번이나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먼저 9절에서 한번 썼고, 10절에서 한번 더, 11절에서 (마치 폭주하듯) 3번을 사용한다. 당연하지만, 11절이 요절이며 라합의 믿음의 고백을 엿볼 수 있다.


2. 연구와 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mIK8KIhB4KM 

조정민 목사님 강해

 

오늘 내용 중 일부는 조정민 목사님의 강해 내용을 바탕으로 하며, 또 일부는 옥한흠 목사님의 강해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이스라엘은 과거 출애굽 당시 정탐꾼을 한차례 보낸 바 있다. 당시 여호수아가 그 정탐 대열에 있었으며, 여호수아는 믿음의 고백을 한 바 있다. 당시의 정탐 상황을 되짚어 보면, 그들이 정탐을 함으로써 알게 된 사실이 크게 2가지 정도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1)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이라는 것, 2)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기골이 장대하다는, 장대한 족속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간담이 녹았었다. 말그대로 두려워한 것이다. 그 때 상황에 비추어 오늘 본문을 보면 또 재밌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오늘 본문의 2차 정탐을 통해 알게된 사실을 살펴보자. 이 정탐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정탐을 하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할 사실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그들은 가나안 땅의 주민들이 그들을 두려워하며, 간담이 녹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1차 정탐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오버랩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어 두번째로 그들이 알게 된 사실은, 가나안 땅에는 함께 멸망되면 안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기생 라합이라는 사실이었다.

사실 본문을 읽으면서, '구지 정탐을 해야 했는가'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애초에 정탐을 하지 않았다면 군사적으로 정비하지 않고 바로 진격함으로써 군사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현실적 합리성을 고려할 수 있다. 게다가 라합 한 사람을 위해 멈춰섰다는 것은 비용적으로 큰 낭비가 아니겠는가? 라합은 기생(= 창녀, 매춘부)에 해당한다. 당시 가나안 땅의 여러 사람들 중에는 가장 낮고 천한 신분이라 한다. 이러한 기생 라합 한사람을 위해서만 장정만 60만, 이스라엘 백성 200만이 멈추어 섰다.(해당 내용은 이지웅 목사님의 설교를 참고했다.) 또한 정탐을 하지 않고 속전 속결로 순종하는 뜻으로 전쟁에 임할 수 도 있었을 것이다. 분명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 땅을 주겠다고 하지 않으셨던가. (조정민 목사님의 설교를 참고했다.) 하지만 이 정탐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을 볼 때, 이 정탐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전쟁을 준비하는 기간을 가졌다. 그들은 섣불리 판단하여 행동하지 않고, 심사숙고하여 준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더불어 처음 본문을 읽을 때 정탐꾼들은 왜 라합에게 갔는지 궁금했다. 이에 대해 조정민 목사님은 크게 의미 부여를 할 부분은 아니라는 의미로 설명하셨다. 그 당시는 모텔이나 호텔 등의 숙박업이 활성화되지 않았다보니, 기생의 집으로 가는 게 당연했을 것이라고 설명하셨다. (아무래도 당시 상황으로는 기생의 집에 묵는 게 당연했을 것이며, 많은 외부인들이 드나드는 상황이기에 간첩의 의심을 받지 않기 최적의 장소였을 것이라는 말.) 

이제 라합의 상태와 그녀의 신앙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 라합의 믿음은 정탐꾼이 그녀에게 이르기 전에 이미 올바르게 서있었음을 볼 수 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였는가? 옥한흠 목사님에 따르면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였다. 라합은 소문 즉, 풍문으로만 하나님에 대해 소식을 들었으나 들음으로만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져 하나님 구원 역사에 포함되게 되었다. 옥한흠 목사님께서는 말씀과 성령, 나라는 주체가 함께 간다고 하셨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조명하신다는 말이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빛을 비추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명을 받고 성령님께 감동된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데 그치지 않고 그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간다. 라합 역시 그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의 장이라고 할 수 있는 히브리서 11장에는, 다양한 믿음의 선배들이 열거되어 있다. 특히 16명의 믿음의 선배들이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여성은 단 두명만 등장한다. 사라와, 라합이 바로 그들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라합의 믿음이 얼마나 귀감이 되는지 다시한번 체감하게 된다. 라합의 믿음은, 말씀에 기반한 믿음이었으며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는 믿음에 기반한다. 특히,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많다고 하면서도 실상 그 삶을 살기 어려울 때도 많다. 이는 옥한흠 목사님의 말마따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하게 서지 않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는 여전히 토착 신앙 가운데 범신앙적인 요소들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많은 조상들이 하나님을 그저 하나의 신으로 믿는 경우도 많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그들은 많은 신들 중에 하나의 또 다른 신을 믿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고, 반대로 하나의 신 중에 하나인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 조상들은 하나님을 믿어 우르르 교회로 나아왔지만, 언젠가 우르르 교회를 벗어날 가능성도 높다고 볼 수 있다. 

또 한가지 의문점이 들 수 있는게, 라합의 거짓말의 행동이 올바른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거짓말은 윤리에 관한 문제인데, 성경은 윤리적 학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는, 이 거짓말 역시 

라합의 거짓말은 죄악일 수 있으나, 하나님은 라합의 믿음을 보고 의롭게 쓰신 것이라 볼 수 있다.


3. 느낀점 

 

오늘 본문을 통해 신앙인의 믿음에 대해 숙고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분명 라합은 풍문으로만 들었던 이야기를 통해 믿음의 실천까지 보였다. 하지만, 라합보다도 하나님을 훨씬 많이 알고 있는 우리는 삶 속에서 하나님께 쓰임받고 있느냐고 돌아보았을 때, 선듯 그렇다고 말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더불어 소문만 듣고 하나님을 이해한 것보다 성경을 손에 쥐고 있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더 깊고 넓게 이해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https://www.youtube.com/watch?v=mURZkuM9DKQ 

옥한흠 목사님 강해

 

이에 대해 옥한흠 목사님은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멸시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특히 우리가 성경 말씀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즉, 우리가 진지하게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앞에 두고 겸손한 자세로 그 말씀을 대하고 있지 않을 때가 많지 않던가?

 


4. 결단과 적용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 중에, 목사님은 자신이 성경을 읽을 때 정자세로 복장을 잘 갖추어 입고 성경을 읽는다고 하셨다. 이 부분이 나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내용으로 다가왔었다. 왜냐면, 나는 성경을 너무나 편하게 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태도가 문제라고 꼭집어 언급하는 것은 논리 비약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는 '습관을 벗어나버리면 경건함이 없어져버리는 것'을 종종 경험하고는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한번 말씀 앞에 겸손해야 함을 깨닫는다. 나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앞에 두고, 그 말씀을 겸손하게 대하기 원하는 결단을 하고 싶다.

매일 연구실에서 성경을 읽을 때마다, 시간을 정해두고, 삐딱한 자세가 아니라 가장 경건한 마음과 자세로 말씀을 대하고 통독하기를 결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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