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ote/PBS

누가복음 14장 15~24절 말씀 묵상

by SeolLab. 2024. 11. 2.
728x90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4장 15~24절]

15.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1. 내용관찰

오늘 본문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15절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누군가의 반응이 나타난다. 이어 두번째부분은 16~20절로써, 예수님의 '큰 잔치의 비유'의 발단/전개/위기에 해당한다. 이어 세번째 부분은 21~24절로써, '큰 잔치의 비유'의 절정/결말에 해당한다.

오늘 본문을 깊게 살펴보기 앞서, 전문맥과 후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14장 전체가 어떤 흐름으로 전개가 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오늘 본문은 '잔치'에 대해 설명하는 본문이며 14장의 정 가운데 위치한다. 오늘 본문에서 정말 많이 반복되는 단어가 '잔치'이다. 직접적으로 '잔치'라는 단어가 사용되지는 않았더라도, '청함을 받다'라는 동사가 많이 사용되었다. 이외에도 15절에서 개역개정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라는 표현은 쉬운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 잔치 자리에 앉은 자'라고 표현된다. 즉, 오늘 본문은 하나님 나라 잔치에 대한 비유가 되겠다. 재밌는 것은 오늘 본문 전문맥인 14장 7~14절에도 잔치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는 것이다. 7~14절 본문의 소제목은 '말석에 앉으라'다. 이 또한 너무나 유명한 본문이다. 

해당 본문의 일부를 살펴보자.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2)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2)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몸 불편한 자들저는 자들맹인들을 청하라

14.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13절의 시작 단어 역시 '잔치'다. 재밌는 사실은 13절의 내용이 21절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13절에서 잔치에 초대될 대상으로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맹인들'이 소개된다. 21절에는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맹인들',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는 내용이 나온다. 13절과 21절에서 각 대상의 나열 순서는 일부 바뀌었지만, 중요한 건 모든 대상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접속사를 알아보았다. 

오늘 본문은 스토리텔링식으로 전개가 되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수의 접속사가 사용되었다. 

가령 16절부터 24절까지 전개되는 스토리 가운데, 역접 1번, 등위 접속사 3번 가량 사용되었다.

18절은 But으로 시작한다. 개역개정으로 보면 접속사가 없지만, 영어 성경으로 보면 거의 모든 버전에서 역접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18절에서 '초청받은 자들이 거절하는 모습'을 17절에서의 '주인의 초청'과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18절과 19절, 20절에는 주인의 초청을 거절하는 사람들의 변명이 나열된다. 이를 연이어 설명하기 위해 19절과 20절에 And 접속사가 사용되었다. 더불어 21절의 가장 앞에는 등위접속사 So가 사용되었다. 이 So는 본문의 두번째 부분인 16~20절과 본문의 세번째 부분인 21~24절을 연결하는 접속사이다.

 

오늘 본문의 후문맥은 25절부터 35절까지의 내용이다. 본 내용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등장하는 내용으로써, 소제목은 '제자가 되는 길'이다. 마태복음에는 5장 13절에 등장하며, 소금과 빛에 대한 내용을 다룬 본문이다. 또한 마가복음에는 9장 50절에 등장하며, 역시 소금에 대해 다루는 본문이다. 중요한 사실은, 후문맥에서 제자된 도리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아래의 26절과 27절에서 "...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한다. 정말 어려운 구절이다.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오늘 본문에서 잔치에 초대 받은 자들은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 '맹인들'과 '저는 자들'인데, 이들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라는 건가? 

후문맥과 오늘 본문을 연관지어 생각해보려고 하니 정말 어렵다. 해당 부분에 대한 필자의 주관적인 연구와 묵상은 아래에서 조금 더 적어보도록 하겠다.

25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2. 연구와 묵상

후문맥의 '제자가 되는 길'과 오늘 본문을 연관지어 묵상해보았다. 누가는 왜 큰 잔치의 비유와 '제자가 되는 길'을 연달아 배치했을까? 필자가 확인해본 바로는 후문맥과 동일한 본문이 등장하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큰 잔치의 비유'와 '제자가 되는 길'에 대한 내용이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지 않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이 두 내용을 배치했을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후문맥의 내용을 정리해보자. 필자가 느끼기에 '제자가 되는 길'의 핵심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이는 곧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행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된 모습'은 누가 보여주고 있는가? 바로 '종들'이다. 그들은 주인의 명령을 따라 군말 없이 순종한다. 그들은 주인과 한 마음이 되어 잔치 자리를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우리 상황에 빗대어 본다면 종들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실 때, 그 말씀에 군말 없이 순종하여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다. 짐 엘리엇(선교사, 책 '전능자의 그늘'의 주인공)은 선교지로 떠나기 전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여호와의 뜨거운 열정을 잘 알고 있다면 그 분의 뜻을 두루 나누기 위해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을 부정해야 한다. 생각해보라. 하늘 보좌에서 "가라!" 라는 음성이 들린다. 사방에서 "와서 우리를 도와주세요!"라는 외침이 들린다. 지하 세계의 저주받은 영혼들조차도 "나사로를 내 형제들에게 보내어 이 고통받은 지옥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소리 지른다. 이런 음성이 들리는데 어떻게 한가로이 집에 앉아 영혼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사도행전 1장 8절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내용 관찰 말미에서 던졌던 질문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잔치에 초대 받은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 '맹인들'과 '저는 자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라는 말인가? 언뜻 '그렇다' 고 답할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가장 연약한 자들을 가장 귀히 사용하신다"는 말을 익히 들었으니까. 하지만 23절을 보라.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한다. 여기서 '강권하여'라는 동사를 영어로 보면 "press upon them~~ (nasb version)" 이라고 되어 있다. 이 표현을 새번역으로 다시 보면 더 직관적인데, "억지로라도~"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즉, 이들은 억지로라도 잔치 자리에 참여하게 된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교회를 출석하는 이들은 다양한 이유로 교회를 방문한다. 누구는 부모님에 의해서 억지로 예배 자리에 앉아있고, 누구는 나오던 관습이 있으니까 그 관습을 저버리기 무서워 예배에 나온다. 또한 누구는 마음이 너무나 복잡하고 어려워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심정으로 교회에 나오고, 누구는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익숙함 아래 교회에 출석한다. 또 누구는 삶에서 감사한 것들이 너무 많아 그 기쁨에 충만하여 교회에 나오고, 누구는 교회 안에서 교제하는 것이 즐거워 교회에 나온다. 그리고 어떤 이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자신을 용서해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교회에 나온다.

가장 이상적인 모습은 가장 마지막 사례일 듯하다. 하지만, 우리 실상이 그렇던가? 교회 나오는 인원 중 그 마지막 사례에 해당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겠는가?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정말 그 부류가 다양하다. '가난한 사람', '몸 불편한 자들', '맹인들', '저는 자들', '억지로 끌려온 사람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한가지씩 결핍이 있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이다. 가난한 사람은 물질적으로 결핍이 있고, 몸 불편한 사람, 맹인, 저는 자들은 신체적인 결핍이 있으며, 억지로 끌려온 사람들은 지각에 결핍이 있어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들은 너무나 연약한 존재들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다. 

18절의 밭을 사서 나가 보아야 하겠다는 사람은 물질을 의존하는 사람으로 비춰지고, 19절의 소 다섯 겨리를 사서 시험하러 가야 한다는 사람은 시간에 의존하는 사람인 듯 보이, 20절의 장가 들었으니 가지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관계에 의존하는 사람을 상징하는 듯하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주인'이신 하나님보다 다른 것들을 우선시했다.

다시 돌아와서, 잔치에 초대 받은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 '맹인들'과 '저는 자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라는 말인가? 그렇다. 그들의 정체성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다. 왜? 그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예수님 앞에 나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예수님 앞에 서는 우리에게 겸손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한번 보여주는 본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게 주신 물질과 시간, 관계보다 하나님을 우선시하며 그 분의 존재 앞에 겸손히 엎드러져 있는가?


3. 느낀점 

나의 가장 큰 죄 중 하나는 교만함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의지할 때가 많다. 특히 남들보다 앞서 있어서 안전하다고 느낄 때, 그 지위를 통해 교만해지려는 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지위를 갖지 못한 누군가를 은근히 무시하거나 깔볼 때가 있다. 

최근에 나와 비슷한 소명을 가지신 분을 만나 뵈었다. 자세한 정보를 밝힐 수는 없지만, 그 분은 강연자로써 성공을 거두신 분이었고,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커리어 스펙을 가지신 분이었다. 그러다가 그 분은 코로나 시국을 맞이했고, 강연 스케쥴이 줄줄이 취소되는 일이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 분은 더 이상 강연자로 서지 못하고 알바를 하게 되었다고. 여기까지의 상황만 듣고서 나는 "큰일 났겠네. 하나님을 원망하셨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분의 이야기는 가희 충격적이었다. 그 분은 오히려 그 알바를 하게 된 데에 감사하셨다고 한다. 이 말이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알바를 하면서라도 부모님께도 용돈을 드릴 수 있는 게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흘렀다고 했다. 나는 그 분의 그런 반응이 너무 놀라웠고,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고 여쭤봤다. 다양한 에피소드를 이야기해주셨지만, 그 분이 이야기해주신 내용을 종합해보았을 때, 믿음을 통해서 가능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분은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알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분은 알바를 강연하는 일보다 하등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신 게 분명했다. 그 분은 알바를 통해서도 겸손히 배우고자 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분이 코로나가 풀린 후에 다시 유명세를 타서 강연자로 활동하게 된 후에도 겸손한 태도를 잃어버리지 않으셨다는 데 있었다. 그 분은 자신이 강연을 하지 못하던 때를 기억하며 오히려 더 겸손해지게 된다고 하셨다. 그러면서도 자기 역시 사람인지라, 새싹처럼 교만한 마음이 자라나는 악함이 있는데 때마다 아내가 그 교만의 싹을 밟아준다고 했다. 그러면서 꼭 좋은 사람을 만나라는 말을 덧붙여주셨다.

이로 미루어볼 때, 내가 잘나갈 때 우쭐한 감정이 드는 것은 악한 본성을 따르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교만은 공동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뿌리뽑아가야 한다고 본다. 특히 하나님께서 나의 결핍을 어떻게 채워주셨는지 계속 생각하다보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다.

 

 


4. 결단과 적용

오늘 GBS에서 결단은 답정너 복음 전도할 것을 유도한다. 새생명축제 기간이니까 당연하겠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자체로만 우리는 행복할 수 있으며 그 행복을 이웃에게 나누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물론 너무 필요한 것인데, 개인적으로 더 묵상이 되었던 키워드는 '겸손'이다.

 

나는 정말 하나님 앞에 철저히 겸손한 모습인가?

나는 정말 군소리 없이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는가?

나는 하나님 당신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물질과 시간, 관계에 목을 매고 있지는 않던가? 

 

나는 어떤 결단을 통해서 겸손의 노력을 꾸준히 이어갈 수 있을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그러다 그 강연하신 분의 실천이 생각났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가치 3가지를 적고, 그 핵심가치 3가지를 이번 한주간 동안 100% 완수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핵심가치를 따르지 않고 비전을 성취하게 되면, 그 비전의 의미가 퇴색된다고 했다. 나는 이번 한주간 다음의 3가지 핵심가치를 설정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가치에 대해서는 100% 완수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자 한다. 

 

1. 정직성 (*나와 사람들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기)

2. 거룩 (*미디어 금식을 통한 절제)

3. 시간 약속 준수 (*미리 5분 먼저 가서 기다리는 것을 실천하겠다. 먼저 가서 기다리는 행동이야 말로 겸손을 보이는 가장 좋은 실천법이라 생각했다.)

'Note > PB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1장 15~16절 말씀 묵상  (16) 2024.10.18
여호수아 2장 1~11절 말씀 묵상  (3) 2024.10.12
여호수아 1장 10~18절 말씀 묵상  (7) 2024.10.05
7과 누구를 따를 것인가?  (2) 2023.05.14
4과 영적인 힘이 고갈될 때  (0) 2023.04.1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