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0 대학1부 설교
“믿음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 감정(12) 현실을 자각하는 시간, 공허함”
김지수 강도사님 (전도서 1장 2~11절)
2.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3.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
4.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대로다.
5. 해는 여전히 뜨고, 또 여전히 져서, 제자리로 돌아가며, 거기에서 다시 떠오른다.
6. 바람은 남쪽으로 불다가 북쪽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고 저리 돌다가 불던 곳으로 돌아간다.
7.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도, 바다는 넘치지 않는다. 강물은 나온 곳으로 되돌아가, 거기에서 다시 흘러내린다.
8. 만물이 다 지쳐 있음을 사람이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으며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
9. 이미 있던 것이 훗날에 다시 있을 것이며, 이미 일어났던 일이 훗날에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 세상에 새 것이란 없다.
10. '보아라, 이것이 바로 새 것이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그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던 것, 우리보다 앞서 있던 것이다.
11. 지나간 세대는 잊혀지고, 앞으로 올 세대도 그 다음 세대가 기억해 주지 않을 것이다.
집중해서 뭔가를 했는데, 막상 얻고 나서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게 될 때 사람은 공허감을 느낀다.
강도사님은 결혼식 직후 가장 공허함을 느꼈다. 누군가는 수능 직후, 또 누군가는 전역한 이후 공허감을 느낀다.
대체로 그토록 바라던 것을 쟁취한 이후 공허감을 느낀다.
한 심리학자는 인간이 삶의 의미를 찾음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발견한다고 했다. 이를 통해 자신이 허무한 존재가 아니라는 믿음을 가진다. 전 세대를 통틀어 이러한 공허감은 계속 존재했으며, 가장 극단적인 경우 자살로 이어졌다. 종국에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되니까.
오늘 본문의 첫 구절은 “헛되고 헛되다”로 시작한다. 오늘 본문 초반부, 저자는 인간이 살아서 얻는 유익이 무엇인지 독자에게 질문한다. 그리고 4~8a까지 ‘해’를 포함한 자연의 ‘반복’에 대해 이야기한다. 최종적인 종착지가 있어 만족이 있을 것 같지만 계속 반복된다는 내용을 강조하는 셈이다. 그는 자연을 관찰한 결과, 만물이 너무 허무하며 지쳐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늘 새로운 것들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 새로운 것들조차 식상한 것이 되며 결국 허무함만 남게 된다.
‘헛되다’는 말은 ‘숨(breath) ‘이라는 말과 같은 어원을 갖는다.
시편 기자는 89편 47절에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라고 했다.
이 허무함은 결국 영원한 것이 없음에 대한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진로를 찾는 과정의 목적은 결국 다 ‘잘’ 살고 싶어서 아닌가? 하지만 내가 잘 살고 싶어하는 모습은 이미 누군가의 현재 모습이며, (그 길에 이미 가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그 행복감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허무함만 강조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전도서지만, 3장 12-14절을 보면,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다” 고 한다. 더불어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하는 말을 깨닫는 것보다 나은 게 없다고 말한다. 허무감은 영원한 것이 없음을 깨닫는 감정이었으니까, 그 감격은 더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훗날 우리의 행동에 대해 하나님께서 분명히 물어보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 자신이 얼마나 떵떵거리며 잘 살았는지 자랑할거냐? 당신의 모습을 두고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겠냐.
쳇바퀴 돌 듯 인생을 살 때는 느끼지 못하는데, 문득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이런 의문이 드는 건,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명확히 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다.
이 말을 듣는 가운데 불편한 마음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신이 내 행동을 좌지우지하는 것 같아 드는 불편감이 있을 수 있는데, 도리어 이 이유가 내 삶의 방향성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얼굴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때는, 내가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멋진 사람이 될 때가 아니라,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습 그대로 변화되는 때이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다.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 삶의 목적을 알게 되며 하나님이 가장 영광 받으신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세상의 삶 뿐이면, 그리스도인만큼 불쌍한 사람이 없다”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라면 우리는 다 한 거짓된 교리에 속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 이후에 영원한 삶이 우리에게 예비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을 이해하고 웃어넘길 수 있다.
돈이 많다면 분명 행복할 것이다. 그럼 얼만큼 있어야 허무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을까? 도대체 얼마 만큼인가? 내가 ‘저걸’ 얻으면 행복하겠다고 했던 경험들이 이미 많을 거다. 그걸 사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도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고 결국 다른 걸 찾아 떠난다.
지난주 이야기했던 감정, 수치심. 수치는 하나님보다 더 만족하고 원하는 것 때문에 비롯된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자아의 완벽한 모습, 그리고 그게 깨질 때 수치를 느낀다. 공허함도 마찬가지다. 하나님보다 만족하고 원하는 것 때문에 비롯된다.
결론은 전도서 12장 13-14절에 나온다.
전도서의 저자의 결론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라 ” 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으실 것이기에. 우리가 의지하고 붙잡아야 하는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다. “내가 왜 그렇게 노력해야 하는가” 라는 의문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답을 얻지 못하면 계속 공허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C.T. 스터드 시인은 다음과 같이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한번 뿐인 인생 속히 지나가리라.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일만이 영원하리라” 전도서가 말하는 말과 동일한 맥락이다.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일만이 영원할 것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을 선물로 생각하고 누린다면 그것만큼 유익있는 것이 없을 것이다.
청춘의 20대 시기, 인생의 공허감이 찾아올 때, 그 감정을 갖게 되는 건 인생의 초점이 흔들리는 때일 것이다. 그 시기에, 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것을 했노라 고백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적용찬양: 주님과 같이
대학부로 돌아온지 2주일이 되었다. 정말 그리웠던 공동체지만, 아직 약간 이질감을 느낀다. 내가 상상하고 기대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느껴지는 감정이다.
때때로 주변인들의 시선이 너무 신경 쓰인다. 제대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무시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그렇다. 이 마음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만, 과도해질 때가 있다. 이 모습 또한 영원하지 않을 것을 좇아 살아가는 모습 아닌가? 영원하지 않을 사람들의 인정과 시선에 목을 매어 살아가는 인생의 끝엔 공허감만 남는다. 영원하지 않을 것을 버리고, 영원한 것을 따라 사는 삶, 그러한 삶을 살기 원한다. 그래서 영원하지 않은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께 초점을 두고 내게 역사하실 그분의 일하심을 기대하려 한다. 12월까지 이어질 팀프로젝트 가운데 함께하실 하나님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