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e/Sermon Note

4.9 사랑의교회 대예배 & 대학1부 설교

SeolLab. 2023. 4. 9.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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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품氣品 있는 인생 A Dignified Life”  - 부활주일
오정현 목사님(요한계시록 1장 9~18절)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6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

 

 


 

 

‘기품’이란 무엇인가? 기품 있는 인생은 사실보고 하지 않고 믿음보고 하는 인생이다.
세상은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것, 뭔가 아우라를 풍기는 것을 기품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기품 있는 인생을 다음 구절을 참고해 말할 수 있다. 에베소서 4장 24절: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조심해라. 거품이 아니라 기품 있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기품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는가? 오늘 본문을 통해 알아보자.

 

1.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이 엎드려진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려져 죽은 자 같이 되매(요한계시록 1장 17절)
-> “죽은 자 같이 된다(헬라어 원어: 네크로 호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예수님의 거룩하신 모습을 보는 순간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했다. 요한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예수님의 부활 자체에 대한 기쁨과 황홀함이 있었지만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늘 본문 속의 그는 엎드려져 죽은 자 같이 되었다.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죄로 뒤덮인 인간이 고꾸라 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뿜어져 들어갈 때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영적인 기품이다.
ex) 아침 대예배 시작 전에 교역자들이 한데 모여 영적인 기품을 회복해야 한다고, 찬양을 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거룩한 품위를 회복시켜 주신다.    

 

2.  “손을 내밀어 가라사대” - 주님의 오른손을 통해 경험하는 치유의 능력

 예수님의 놀라운 고귀함, 거룩함, 영광과 함께 그의 인성은 사람들을 만지시고 위로하시는 속성을 담았다.
나병환자들의 평생은 너무나 외롭고, 상처받고 저주받은 인생이다. 율법을 봐도 격리하라고 하라고 되어 있지 않던가?
그런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라고 하셨다. 그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 이는 강력한 양면성이다. 7 별을별을 잡으신 강력한 하늘의 왕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양면성을 보이시면서, 불타오르는 눈을 가지신 그분이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오셔서 모두를 위로하시고 그에게 나오라 명하신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3. 알파이자 오메가이신 주님

요한계시록 1장 17b-18절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찬송과 말씀과 예배를 올려드리니까,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우리의 기품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 아닌가?

Logos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우리는 그 분과 다 동행하는 자 아니던가? 2000년 전에도 예수님은 마음이 어려운 자들, 몸이 아픈 자들과 함께하셨다. 주님은 엄격하시지만 자비로우신 분이다. 그런 분이 우리와도 동행하시는데, 그분이 우리와 동행하시는 가장 큰 증거가 뭐냐? 그 증거는 다른 게 아니라 2000년 후에 이렇게까지 예배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죽은 예수님을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가 찬양하고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증거 아니겠는가? 우리가 예배하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 받으신다.

적용찬양: <어린양의어린 양의 흘리신 피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릴 때, 닫힌 문이 열리고 거룩한 지성소로 들어가게 하소서. 거룩한 존전 앞에 우리가 머리를 숙일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을, 우리의 영혼을 위로하시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순전한 복음을 전할 때만큼 사역자가 품위 있는 시간이 따로 없다. 우리는 우리 주위의 상처받고 마음이 어려운 주위의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목회자가 복음 전할 때만 그 품위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이 함께 그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만날 것이다.

 

 


 

“Love and Rommance: 원빙데 – 원투원을 빙자한 데이트”

김지수 강도사님 (마태복음 18장 6-7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1. “Flutting” – (연애할 목적이 있으면 Flutting은 좋은 것이지만, 연애할 목적도 없이 자기 만족을 위해,(흔히 어장관리) 하는 것이면 이는 예수님이 말하는 ‘화’된 행동, 함께하는 동역자를 오해(실족)하게 하는 행위다. )

 

원투원은 리더와 그 목원이, 엘더가 그 리더와 하는 것. 왜? 함께 기도하는 동역자로 관계로 발전하기 위해. 데이트 목적이 아니다. 그렇기에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원투원이라는 이름으로 접근한다면, 분명 그 관계가 연애를 포장한 관계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리더가 예전 목장의 목원과 원투원하는 것도 안된다.


2. 밤늦게 연락하는 것

밤 10시 이후에 개인적으로 연락하지 말라.
목장의 목장 카톡이 있고, 전체 톡방이 있는데 절대 개인적으로 밤에 연락하지 말라. 물론, 연애를 할 감정이 없는데 이런 식으로 연락을 하는 짓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연애할 마음이 없음에도 괜히 심심해서 연락을 주고받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밤 늦게 연락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설레임을 주기 때문이다.

 

3. 연인 사이가 아닌데도 놀러 가자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단칼에 잘라내야 한다. 가령 누군가가 단둘이 바다 보러 놀러가자고 하면 “내가 왜 가야되냐”고 되물어라.
Q: '관계가 나빠질까봐 단칼에 잘라내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인데 어떡하는가?'
A: 그럼 맷돌을 불러오라. 그건 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행위다. 처음에 거절했다면 상대가 당할 마음의 상처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시간을 끌다가 거절하면 상대가 당할 마음의 상처는 무척 크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거절하는 것은 내가 응당 해야 할 일이다.
또한 10번 찍어서 안넘어갈 나무는 없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옳지 않다. 안 넘어간다. 두 세번 찍어서 안넘어가면 마음을 접는 게 옳다고 본다.  

누군가를 그렇게 실족하게 하는 자는 우리 공동체에서 찍어 없애 버려야 할 존재다. 응당 이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아니겠는가? 작은 자가 실족하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겸손한 자세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괜히 연락하고 잦은 스킨십으로 인해 우리의 평판을 깎아 내리면 안 된다. 연애할 목적도 없는데 자기 만족을 위해 위해 하지 말라는 말이다.

상대를 정말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로 생각한다면, 함부로 상대를 대하지 않는다. 함부로 flutting을 하지 않고 쳐낸다. 그렇게 지내다가 감정이 생기면, 건강하게 매력을 발산하고 flutting하라. 어디에서든 매력을 뿌리고 다니지 말라는 말이다.  

 

우리는 어떤 배우자를 만나기 원하는가? 늘 불안한 사람인가 아니면 자신의 행동에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인가? 후자 아닌가? 그런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안다.
내가 그런 사람을 만나려면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QnA

 

 

Q: 남사친, 여사친이랑 단둘이 보는 것은 괜찮은가?
A: 잘 모르겠다… 결혼 후에 남사친/여사친을 별로 안본다. 그렇기에 남사친/여사친은 없다고 생각한다. 연인 아니면 모르는 사람이다.


Q: 더 좋은 사람, 더 잘생긴 사람, 더 좋은 이성을 만날 것 같아 마음을 한 곳에 두기 어렵다.

A: 절대 이런 모습을 정죄하지 말라. 이런 연약한 모습이 있을 수 있다. 결혼은 주님이 나를 사랑하셨듯이 상대를 사랑하겠다는 표현의 과정이다. 연애는 결혼의 훈련과정이자,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를 사랑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다.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할 것인가, 감정에 따라 환승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의지적으로 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인지 계속 고민해야 한다.


 

Q: 연애할 목적도 없는데 flutting 한 상대에게 상처를 받았다면?

A: 걔는 걔다. 상대가 그런 fluttin을 해서 내가 상처를 받았다면, ‘그냥 그 자식은 그런 자식’이라고 결론을 내려라. 그 자식을 마음에서 비워내라. 그러곤 나는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거라는 마음으로 기다리면 된다.



 사춘기, 중고등학교 시간에 입시만 겪다보니 20대에 들어 사춘기를 겪는 지체들을 많이 본다. 20대를 보내는 가운데 우당탕탕하지만, 훈련을 받으면서 성장할 수 있길 바란다. 사람이 실수를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실수를 발견했다면 당장 멈출 수 있길 바란다. 신중하게 상대를 대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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